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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는 마을 ㅣ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3
이바라기 노리코 지음, 정수윤 옮김 / 봄날의책 / 2019년 1월
평점 :
나는 일본 유학 시절 다니던 학교에서 매년 윤동주 강연회가 열린다는 사실에 놀랐다. 일본에 윤동주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니.... 이 궁금증은 윤동주를 사랑한 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로 연결되었다. 『처음 가는 마을』은 전후(戰後)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대표작을 모은 시선집이다. 전쟁의 아픔을 경험한 그녀는 창작의 출발점이 전쟁이라 말한다. 그녀는 제국주의 일본의 만행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성숙하게 받아들이고 그 감정을 시로 표현했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대표작인 ‘내가 가장 예뻤을 때’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하루하루 불안하게 살아야 했기에 아름다움이 죄였던 시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예뻤던 그녀가 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마다 와르르 무너져 내려
엉뚱한 곳에서
푸른 하늘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곁에 있던 이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 모를 섬에서
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중략)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멍청한 짓이 또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마구 걸었다
(중략)
그래서 다짐했다 되도록 오래오래 살자고
나이 들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 루오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녀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 무렵, 거울에 비친 모습이 예쁘게 보인 적이 있었지만 사느냐 굶어 죽느냐의 상황에서 젊음을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10년이 지나 이 시를 쓴 것도 그때의 아쉬움이 남아서였는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자신의 에세이에 적는다. 전쟁이라는 ‘멍청한 짓’ 때문에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건물이 무너져 보이면 안 되는 ‘엉뚱한 곳에서’ 하늘이 보인다. ‘곁에 있던 이들이 숱하게 죽었던’ 전쟁의 참혹함과 일본의 무모함을 돌아본다. 전쟁으로 청춘을 잃은 공허함을 노래하지만 그럼에도 ‘오래오래 살아가겠다’는 희망과 의지도 담아낸다.
시인으로서 모국어로 시를 쓴다는 숭고함을 알고 있던 그녀는, 일본이 한국 사람들에게 언어를 빼앗아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윤동주가 포기하지 않고 한글로 시를 써나간 일에 공감하고 마음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겠다. ‘이웃 나라 언어의 숲’에선 윤동주를 흠모하는 그녀의 마음과 한글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이바라기 노리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후 상실감과 그리움을 담은 시 11편이 후반부에 실려있다. 현란한 표현으로 꾸미지 않아도, 아니 오히려 담백해서 남편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나답게 사는 것이 얼마나 눈부신 일인지 시로 말한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또 다른 대표작인 ‘자기 감수성 정도는’과 ‘기대지 않고’에서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강하고 아름답게 살았던 삶의 태도와 성숙한 인격이 나타난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는 그녀와 닮아있다. 정직하고 꾸밈이 없다. 직설적이지만 따뜻하다. 난해한 비유를 쓰지 않아 쉽게 읽히지만, 찬찬히 곱씹다 보면 시의 깊이에 문득 놀라게 된다.
요즘은 시의 시대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잘 쓴 문장 하나, 본질을 건드리는 단어 하나는 울림이 크다. 고르고 골라 세상에 내놓은 시의 한 구절, 시어 하나하나가 소중한 이유다. 세상도 마음도 어지럽고 시끄러운 요즘, 곁에 두고 싶어지는 책이다. 국적도 언어도 세대도 다른 시인이 건네는 위로가 복잡하고 걷잡을 수 없던 마음을 보듬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