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성적 관계 같은 그런 것은 없다"

지난번에 신간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를 '최근에 나온 책들'의 하나로 꼽았었는데, 나는 필요 때문에 다른 책들보다 먼저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이 논문선집의 요점 중의 하나는 라캉의 성구분 공식에 대한 독해/이해를 제공하는 것이고, 브루스 핑크의 서론격 글인 "성적 관계 같은 그런 것은 없다"(There's No Such Thing as a Sexual Relationship)은 그런 역할에 충실하다.

 

 

 

 

나는 이전에 같은 테마를 다룬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이제이북스)을 읽었더랬지만, 그 번역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대목들이 핑크의 글에서는 명쾌하게 정리/해명되고 있었다. 해서, 라캉 읽기의 '걸림돌'이라고 할 만한 몇몇 대목들, 가령 '욕망 그래프', '네 가지 담론', '성 구분 공식' 등에 대해서 이젠 편하게 참조할 수 있는 책들이 우리에겐 주어졌다(앞의 둘에 대해서는 지젝을 참조하면 된다).

 

 

 

 

핑크의 글에 대해서는 편역자 해제에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군말을 덧붙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해서 독자들은 그냥 읽어나가면 되는데, 여기선 내가 개인적으로 읽어나가다가 유려한 번역이지만 좀 미심쩍게 생각되는 몇몇 부분을 짚어보기로 한다. 옥의 티라고 할 만한 대목들이 몇 군데 있어서이다.

가벼운 것부터 지적하면, 64쪽에서 '사물'이 발견하는 기표의 예로 든 'art'는 '예술'이 아니라 '미술'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그러니까 '예술', '음악'이 아니라 '미술', '음악'이다).그건 67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74쪽에서, "적어도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로가는 저 오래된 형식과 질료의 은유"에서 '형식'은 물론 'form'의 번역이지만, 이 경우에는 '형상'이라고 번역하는 게 관례이다. 나는 '형식(형상)' 정도로 옮겨주는 게 나을 거 같다. 65쪽에서 "원인을 의미화하기"는 "subjectifying of the cause"의 번역인데, 역자가 "signifying of the cause" 정도로 잘못 본 것 같다. 다른 대목의 번역들을 보건대, "원인을 주체화하기"라고 옮겨져야 할 듯싶다. "그 자신의 원인이 되기"란 뜻이니까.

76쪽에서 "라캉은 S(빗금A)에 관해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은 "The little Lacan directly says about S(빗금A)"인데, 여기서 little은 형용사나 부사가 아니고 명사이며 (사전에 따르면) '적으나마 있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풀어서 얘기하자면, "라캉이 S(빗금A)에 대해서 직접 언급한 것은 얼마 안되지만, 그에 따르면"이란 뜻이다(요컨대,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이 아니라 "직접 언급한 것"이다).

78쪽에서 "왜냐하면 그 파트너는 '남자들'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고, 따라서 여자는 남자와 '관계하거나' 남자를 '따르기' 위해서 남자에게 호소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는 "S(빗금A), as that partner is not situated under 'Men' at all, and thus a woman need have no recourse to a man to 'relate' or 'accede' it."의 번역인데, 이건 내가 보기에 오역이다. 역자는 맨마지막에 나오는 it을 남자들(Men)으로 봤는데, 문맥상 '그 파트너'인 S(빗금A)이어야 한다. S(빗금A)는 '남자들'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당연히 S(빗금A)와의 관계에서 '남자들'은 불필요하다는 얘기이니까(남자를 따르기 위해서 남자에게 호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81쪽에서 "그것은 남근 경제나 단순한 구조주의 안으로 결코 만회될 수 없다"고 한 것은 "It can never be recuperated into a 'phallic economy' or simple structualism."의 번역인데, (오역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나라면 "그것은 남근경제나 단순한 구조로 결코 회복될 수 없다"라고 옮기고 싶다. 바로 위 문단에서는 'Sexual relationships'를 '성적 관계'라고 단수로 옮겼으므로 그것을 받는 'they'도 단수인 '그것은'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수의 일치상). 아니면, '성적 관계'를 '성적 관계들'로 옮기든가.

85쪽에서 "프로이트는 여자는 법에 대해서 이와는 다른 관계를 맺는다고 제안하는데, 그는 그 관계를 아직 덜 고도로 발달된 자아-이상이나 초자아와 관계지었다."는 "Freud suggests that women have a different relation to the law, which he correlates with a less highly developed ego-ideal or superego"의 번역인데, 역자는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를 relation으로 보았다. 나는 그게 law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지젝이 다른 자리에서 지적하는 바이지만(144쪽) 라캉에게서 법은 상징적 자아-이상으로서의 법과 초자아 차원에서의 법이라는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  

근간으로 돼 있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The Lacanian Subject)>는 몇 차례 언급한바 있지만, 가장 명쾌한 라캉 입문서이다. 좋은 번역서가 조만간 나온다면, 라캉에 대한 많은 오해와 갈증이 해소될 걸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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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지젝과 함께 한국문학을 읽다

*모잡지의 청탁을 받고 며칠 끙끙거리며 쓴 글이지만, 늑장을 부린 데다가 좀 '도취적'이어서 게재여부는 아직 불확실하다. 각주를 모두 생략하고, 부분적으로 재편집해서 여기에 올려둔다.



 

 

 

1. 지젝, 혹은 우리시대의 엘비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면서 끊임없이 지절대는 철학자이자 지식계의 스타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비단 그가 지난 2003년에 내한한바 있다는 전력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자신의 이름으로 50권 이상의 책을 출간한(국내에는 ‘지젝’이란 이름과 관련된 20권 가량 번역/소개돼 있다) 지젝은 특히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학의 접속을 주된 이론적 지반으로 하여 글을 쓰면서도 세계적인 명성과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물론 그러한 인기/명성의 원인은 단순한데, 그건 그가 칸트와 헤겔을, 그리고 라캉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대중’이 말이다.

 

특히나 그의 이름은 일련의 ‘영화책’들 덕분에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됐는데,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삐딱하게 보기>,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같은 책들에서 지젝은 라캉의 난해한 이론과 고급스런 정신분석 담론을 이해하는 데 히치콕이나 할리우드 안팎의 대중영화들이 얼마나 유용하며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21세기형 철학자’를 ‘MTV 철학자’라고도 부른다지만, 그런 포스트모던한 별명보다는 (다소 구닥다리 같더라도) 모던한 별명이 그에겐 더 어울려 보인다. ‘철학계의 록 스타’, ‘문화이론의 엘비스’ 같은.

 

모호한/난해한 아카데미 담론과 대중문화를 접속시켜줌으로써 지젝은 무슨 일을 하는가? 바로 아카데미 바깥의 대중들이 자신의 생활주변과 자신이 향유하는 문화 속에서 철학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매개자 역할을 하는 것. 그리고, 사실 이러한 역할은 백인의 컨트리뮤직과 흑인의 리듬앤블루스를 결합시킨 록음악의 정신에 얼추 부합하지 않는가? 지젝과 ‘지젝 현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은 한 영화감독의 말대로, 지젝은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의 시대에 지성주의(intellectualism)란 게 얼마나 재미있고 활기차며 뻑적지근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는 ‘우리시대 엘비스’에 값한다(사실 그가 강연 등에서 보여주는 폭발적인 제스처는 역시나 폭발적인 엘비스의 무대매너를 연상시키는 바가 있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얼마나 열정적인 것인지!). 해서 말하건대, 지젝을 읽는 일은 엘비스의 <버닝 러브(Burning Love)>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흥겨운 일이며 흥분되는 일이다(우리는 그들의 ‘불타는 사랑’에 후끈 달아오르는 ‘품행 불량한’ 헝크(hunk)이고 매스(mass)이다). 그 지젝, 혹은 우리시대의 엘비스와 함께 한국문학을 읽는다? 

  

2. 이데올로기의 하찮은 대상

지젝이 ‘철학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서구 지식사회에 등록하게 되는 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발표함으로써이다. 지젝은 마르크스/엥겔스의 ‘왜곡된 의식’ 혹은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론만으로는 소위 ‘탈이데올로기화’된 포스트모던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해명하는 데 불충분하다고 본다. 오늘날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며 발견되고 폭로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한껏 비웃어주는 ‘냉소적 주체’이기에. 그리고 바로 그러한 현실이 우리가 탈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환상을 부추긴다. 그것은 물론 ‘환상’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행동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것은 ‘앎’이 아니라 ‘행함’이다(“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아주 잘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행하나이다”). 우리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이데올로그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적 실천 속에서 가령, 변기에서 물을 내리는 것과 같은 ‘하찮은’ 일에서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지젝은 독일과 프랑스, 영국에서의 세 가지 변기 사용법을 예로 든다.

 

전통적인 독일식 변기에는 물을 내릴 때 대변이 사라지는 구멍이 앞쪽에 있어서 우리가 대변 냄새를 맡고 무슨 병이 있는지 없는지 점검해볼 수 있도록 돼 있다. 전형적인 프랑스 변기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구멍이 뒤쪽에 있다. 즉, 물을 내리자마자 대변이 눈앞에서 사라지도록 돼 있는 것이다. 끝으로 영국의 변기는 이러한 두 가지 방식의 통합형, 혹은 중재형이다. 즉, 물통에 물이 가득 차 있어서 대변이 물속에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점검까지 가능한 것은 아니다.

 

헤겔은 영·불·독이란 지리적 3항에서 세 가지 다른 실존적 태도를 최초로 읽어내고자 했었다. 그에 따르면 독일은 ‘반성적 철저함’(=보수주의)과, 프랑스는 ‘혁명적 조급성’(=혁명적 급진주의), 그리고 영국은 ‘온건한 공리적 실용주의’(=온건한 자유주의)와 짝지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세 가지 변기 사용방식과도 상응한다. 해서, 우리가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살고 있다고 탁상에서 떠들어대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잠시 화장실에 들르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곧장 이데올로기에 ‘몰입하게’ 된다.   

 

이러한 ‘예기치 않은’ 사례들과의 조우는 지젝을 읽으면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바이지만, 사실 우리의 ‘엘비스’는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가 제안하는바, 여성 음모(陰毛)의 세 가지 스타일에서 우리는 동일한 기호학적 3각형을 만나지 않을까? 무성하게 자란 헝클어진 음모는 자연적 자발성을 존중하는 히피(hippie)족 여성의 태도를 가리킨다. 반면에 여피(yuppie)족 여성은 잘 가꾸어진 ‘프렌치 가든’형을 선호한다(비키니 라인을 따라 양 다리쪽의 음모를 제거함으로써 중앙에 면도선을 따라 좁은 밴드 형태만 남겨놓는다). 그리고 펑크(punk)족 여성의 경우에는 음부 전체를 면도해 버리고 (대개는 음핵에) 고리를 달아서 장식한다. 더불어, 이러한 3각형의 구도는 레비-스트로스의 기호학적 3각형 버전으로 말하자면, ‘날것’으로서의 무성한 음모, 잘 손질된 ‘구운’ 음모, 완전히 면도한 ‘끓인’ 음모에 대응하지 않을까? 이러한 사례들까지 동원하여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가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갖는 가장 은밀한 태도조차도 이데올로기를 ‘발언’하고 ‘실천’한다는 것. 그러니, 누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말하는가? 

 

3. 그토록 하찮은 문학

지젝이 제안한 바는 아니지만, 문학에 대한 ‘공공연한’ 태도에 있어서도 우리는 세 가지 태도를 대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민족문학’이라는 엄숙주의적 태도를 별개로 한다면, 우리는 히피적 태도, 여피적 태도, 펑크적 태도를 구분해낼 수 있을 것이며 이들을 각각 자유주의, 유미주의, 반항주의에 대응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레비-스트로스의 분류를 가져오자면, 이들의 문학은 각각 ‘날 문학’ ‘구운 문학’ ‘끓인 문학’이 될 것이다.

 

‘민족문학’이 민족적/사회적 대의(大義)와 문학을 분리시켜서 사고하지 않는다면, ‘날 문학’으로서의 히피문학은 문학과 삶을 연속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구운 문학’으로서의 여피문학은 ‘잘 구운 항아리’, 한갓 ‘예술작품’으로서의 문학을 지향한다. 그것의 다른 이름이 ‘문학주의’이다. ‘끓인 문학’으로서의 펑크문학은 문학행위를 하위문화적/비주류적 (저항)정신의 등가물로서 사고한다. 이 세(네) 가지 태도/주의가 어쩌면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한국문학을 규정지으며 분할해온 구도는 아닐까?(물론 발생론적인 순서에 있어서 가장 먼저 오게 되는 것은 히피문학일 것이다. 여피문학과 펑크문학은 그 뒤를 따른다.) 

 

지난 세기 후반에 한국문학은 흔히 명시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차별적 태도를 준거로 하여 1980년대 문학과 1990년대 문학으로 대별됐었다. 90년대 문학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 과잉시대’로 규정된 전(前)시대, 즉 80년대와의 대척점에서 자신의 세대론적 의의와 문학사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념이란 지주를, 혹은 ‘공룡’을 상실하거나 배제한 문학은 스스로를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며 문학의 자리를 ‘그늘’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이 ‘풍금이 있던 자리’, 이념의 공백에서 시작된 새로운 세대, 젊은 작가들의 ‘사소한’ 문학은 80년대 집단적 주체를 대신하는 ‘개인 주체의 귀환’이면서 동시에 ‘비루한 것의 카니발’(황종연)이었다.

 

 

 

 

 

 

 

 

이 세대의 작가들은 환멸과 냉소를 삶과 세계에 대한 주된 태도로 갖는 탈이념적 주인공들을 문학사에 등록시켰고, 이 나르시시스트 주인공들은 자신의 사회적 소외를 감내하면서 거창한 이념으로부터,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도덕적 명령으로부터 도주하거나 달팽이처럼 자신의 내면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면서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의 ‘가난한’ 자유를 음미하고 향유했다. 이 히피주의 문학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정서’였으며, 그들의 물질적 가난조차도 그 정서의 빌미였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IMF시대를 통과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우리는 60년대 이래의 다소 유구한 전통을 지닌 자유주의 문학, 히피문학 대신에 보다 대극화된 문학과 대면하게 되는데, 그것이 여피문학과 펑크문학이다(김영하와 백민석은 두 전형이다). 물론 이들의 간극을 낳는 것은 경제적 심급이며, 이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건 ‘가난’이 아니라 ‘빈곤’이다. 즉, 여피문학과 펑크문학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혹은 각기 다른 급으로 문학이란 ‘화장실’을 쓰는 것이다. 이 두 갈래의 문학이 결코 지양되지 않는 사회적 적대와 결코 봉합되지 않는 그 적대의 간극을 문학적으로 반영/반복하고 있다면, 우리는 ‘문학은 없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지젝도 자주 반복하고 있는, (사회적 적대관계에 의해서 빗금쳐져 있기 때문에) ‘사회는 없다’는 명제를 비틀어서 말이다. “우리는 문학으로 하나다”라는 식의 대문자 문학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어쩌면 문학의 가장 순진한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4. 초월적 상상력과 문학의 존재론

지난 계절에 나온 젊은 비평가들의 몇몇 비평문들은 지젝의 철학/정신분석학을 적극적/암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90년대와 21세기 동시대 작가들의 문학행위에 대한 ‘인지적 지도그리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눈길을 끈다. 그 중에서도 김영찬의 <90년대 문학의 종언, 그리고 그 후>는 ‘90년대 문학’ 이후 한국문학의 지형과 향방에 대한 조감을 제공해주고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그에 따르면, 이 ‘종언’에 관한 이야기는 은희경의 신작소설 <비밀과 거짓말>(2005)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그 문학적 성과와는 무관하게 90년대 문학에 대한 ‘형식적 종결’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다분히 우연한 것으로 보였던 ‘90년대 작가’들의 변화에 사후적으로 개입하여 그것을 일정한 집합적 맥락으로 계열화하고 ‘1990년대 문학의 죽음’이라는 분명히 의식화된 지표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밀과 거짓말>에 의해서 ‘90년대 문학의 죽음’은 상상적인 것에서 상징적인 것으로 이행한다. 그러한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허무의식’이다. 작가 은희경의 데뷔작인 <새의 선물>(1996)을 지배하는 주제의식은 ‘환멸’이며, 이 환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애착을 환멸의 예외적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만 작동한다. 부정적인 세계 바깥으로부터 침해당하지 않는 ‘나’를 온전하게 정립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그것은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밀과 거짓말>의 허무의식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이때 허무의 근원에는 세계와의 냉소적인 지적 거리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주체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이 가로놓여 있다.” 이러한 무력함/무능력이 소환하게 되는 것이 ‘죽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나’는 이 거대한 타자의 질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비극적 자각을 갖게 된다.

 

비록 그러한 자각이 ‘주체의 성숙’의 표지이면서 동시에 ‘주체의 위축’을 드러내는 증상일 수도 있지만, 주목할 것은 그러한 소환행위에 의해서 부정되는 것이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상상적 절대화”라는 점이다. 즉, 90년대 문학의 근거가 부정되는 것이다. 90년대 문학의 개인 주체는 크게 보아 ‘상상적 주체’이며, 김영찬은 백민석, 김영하, 조경란, 배수아 등 ‘90년대 작가’들이 최근 보여주는 변화로 이 “상상적 주체의 미묘한 형질변화”를 꼽는다. 그리고 <비밀과 거짓말>은 “그동안 다른 작가들의 소설에서 단편적․분산적 징조로만 드러났을 뿐 완결되지 못한 변화의 가닥들을 하나둘 수렴해 그들을 대표하는 의미심장한 선언으로 완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90년대 작가들’의 행적과 미래에 대한 ‘반성적 알레고리’가 된다고 평한다.

 

이러한 구도는 아직 불확정적으로 구획돼 있는 90년대 문학과 2000년대 문학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우면서 유익하다. 하지만, 문학사적 흐름, 혹은 문맥을 <비밀과 거짓말>이란 작품을 기준으로 하여 소급해가고 있기 때문에, 즉 통시적으로 접근해가고 있기 때문에 공시적인 차원에서 젊은 작가들의 ‘상상적 주체’가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고 또 변모해 가는지에 대한 조명은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더불어, 문학 존재론의 근간이 되는 상상력을 나르시시즘적인 상상계와 거의 동일시하게 되면 문학이 초월적 상상력과 갖는 원초적인 관계양상을 제대로 규명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지젝을 참조할 수 있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사실 칸트 철학에서 현상계와 예지계, 우리의 감성(=가슴)과 지성(=머리)을 매개해주는 것으로 도입되는 ‘초월적 상상력’의 곤궁 혹은 양면성에 대한 이해는 지젝의 철학적 주저들에서 자주 반복되며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현상계와 예지계 어디에도 환원되지 않는 상상력은 수용적인 동시에 정립적이며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그것은 흔히 감각에 주어지는 다양을 한데 모으는 종합의 능력을 지칭하는데, 이러한 ‘종합활동’의 이면에 놓여 있는 것이 상상력의 ‘부정적’ 특징으로서의 ‘분해활동’이다. 즉, 상상력은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다양을 그대로 수용하여 종합하기 이전에 먼저 분해하는 것이다. 그러한 분해활동이 산출해내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세계의 밤’(헤겔)이다.


"인간은 이런 밤, 즉 모든 것을 단순한 상태로 포함하고 있는 이 텅 빈 무이다. 무수히 많은 표상들, 이미지들이 풍부하게 있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곧장 인간에게 속해 있지 않다. 이런 밤, 여기 실존하는 자연의 내부, 순수 자기(self)는 환영적 표상들 속에서 주변이 온통 밤이며, 그때 이쪽에선 피 흘리는 머리가, 저쪽에선 또 다른 흰 유령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가 또 그렇게 사라진다. 무시무시해지는 한밤이 깊어가도록 인간의 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 밤을 목격한다."

헤겔이 묘사하는 바대로 부정적·파열적·분해적 상상력이 하는 일이란 연속적 현실을 ‘부분대상들’로 해체하는 것이다. 즉 “상상한다는 것은 몸체 없는 부분 대상을, 모양 없는 색깔을, 몸체 없는 모양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이 산출하는 ‘세계의 밤’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지점에서의 초월적 상상력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러한 부정적 매개자로서의 상상력의 존재론적 지위가 ‘데카르트적 주체’의 그것과 상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지젝에 따르면, 자연과 문화 상태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 곧 ‘사라지는 매개자’가 바로 근대의 ‘데카르트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말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정립할 때 이미 자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문화도 아닌 상태를 창조해야 하는바 데카르트적 회의에서 이것은 전면적인 ‘자기로의 철회(withdrawal-into-self)’라는 제스처로서 나타난다. 지젝에 의하면, 이러한 제스처는 광기의 일종이다. 이 광기는 앞에서 헤겔이 ‘세계의 밤’이라고 부른 것에 대응하는데, 상징적 우주 혹은 문화적 세계가 형성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세계의 밤’, 곧 ‘분해적 상상력’에 의해서 현실이 소거될 때, 그리하여 세계가 절대적 부정성으로서 경험될 때뿐이다. 데카르트의 ‘자기로의 철회’는 이러한 극단적 상실의 경험이다. 그리고 이 상실의 자리, 텅 빈 공간이 바로 주체의 자리이다.

 

주체와 상상력의 이러한 차원에 우리가 주목할 때, 우리의 90년대 작가들이 이념의 상실, 이념의 공백 상태에서 직면하게 된 것은 오히려 상상력으로서의 문학 본연의 ‘부정성’이 아니었을까? 종합적 상상력이 아닌 분해적 상상력 말이다. 그리고, 문학이란 이러한 분해적·종합적 상상력에 근거하며 특별히 문학적 주체란 그러한 상상력이 활성화된 주체인바, 시인/작가의 문학적 태도란 이 상상력, 특히 ‘세계의 밤’에 대한 태도로서 규정될 수 있지 않을까? 이 두려운 밤(=상상력), 혹은 견디기 어려운 텅 빈 ‘주체’를 어떻게 채워넣는가, 어떻게 ‘주체화’하는가 하는 차이로써 말이다(‘주체화’란 우리들 자신을 언어 등과 같은 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이다).


5. 동물원과 미술관 사이

그렇다면, 문학적 상상력이란 동물원(=자연)과 미술관(=문화)을 매개해주는 것인바, 지난 9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유난히 동물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사실은 자연스럽다. 대타자로서의 이념이라는 가로막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상상력의 밑바닥을 헤집으며 상상력의 부정성을 길어 올린다는 의미를 함축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신경숙의 초기 대표작 <풍경이 있던 자리>(1993)의 서두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동물의 행동>이란 책에서 인용된 동물원 풍경이었다. 코끼리 거북을 사랑했던 어느 동물원의 수컷 공작새 얘기 말이다. 이후에 ‘동물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대표적인 90년대 버전으로 우리가 꼽을 수 있는 것은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2000)과 배수아의 <동물원 킨트>(2003)일 것이다. 우리시대의 대표적인 두 ‘펑크작가’에게서 “상상적 주체의 미묘한 형질변화”는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까?

 

 

 

 

 

 

 

 

먼저, 백민석에 대한 젊은 비평가의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즉 그의 소설들은 포스트모던 시대 상징계의 약화로 인한 오이디푸스의 위기와 이에 대해 ‘이상한 가역반응’으로 대처하는 ‘괴물’(‘포스트모던 리바이어던’)들을 주로 테마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엽기전>의 세계는 편집증이 무대화된 악몽의 체계이며, 그곳에서 사는 인간은 자연상태로 환원된 인간-동물이다.” 물론 체계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문학적 공격은 현실적인 한계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체계는 그에 대한 위반을 허용하는 방식을 통해 가장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백민석의 전복적 서사가 비록 한국문학/문화의 지형도를 바꾸어놓는 데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은 이제 기성 질서와 체계를 위협하는 반란과 탈주가 아니라 오히려 기성 질서 자체가 허락하고 용인한 한도 내에서의 반란과 탈주라는 느낌이 더 짙다.” 즉, 펑크는 분명 기성의 질서나 체계에 시위하고 반항하지만, 그러한 시위/반항 자체가 오히려 체계의 정상성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순기능’을 담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돌파할 수는 없는 것일까? 혹은 그 한계는 ‘엽기전’ 전략이라는 내용층위의 전복 전략이 갖는 함정과 관련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의혹을 갖게 되는 것은 ‘에세이스트’ 배수아의 또다른 펑크 전략이 대체로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동물원 킨트>에서 전면화되고 있는 배수아의 전략은 ‘야수의 탈’을 뒤집어쓰고 아이 유괴, 학대, 살인 등등을 피범벅으로 감행해야 하는 백민석의 전략보다 상대적으로 아주 단순한데, 그것은 순수하게 형식적 차원에서 문학을 일종의 ‘이방인 놀이’로 만드는 것이다. 즉, 자신의 모국어를 외국어로 말하는 것(“가장 좋은 방법은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를 보고 그런 식으로 말하고, 사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방법이긴 하지만, ‘자기로의 철회’에 있어서 백민석의 경우보다 훨씬 더 철저하면서도 급진적인 효과를 낳는다. ‘동물원’이라는 이러한 철회의 과정을 경유하여 배수아가 도달하고 있는 지점이 ‘에세이스트’이고 <에세이스트의 책상>(2004)이다(‘에세이스트’야말로 배수아 식의 ‘데카르트적 주체’가 아닐까?). 이 작품의 진정한 의의는 ‘작가의 말’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가능하다면 다른 것을 쓰되, 사람들이 그것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는 그런 형태를 원했다.” 문제는 순수하게 ‘형태’적인 것이며, 에세이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무정형의 생성적 형식을 통해서 배수아는 문학주의라는 여피적 태도를 불편하게 만든다. 

 

‘엽기 소설’과 ‘에세이 소설’을 쓰는 두 펑크작가의 이러한 차이가 예시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90년대 우리문학이 비로소 바닥까지 발을 딛게 된 초월적 상상력에 대한 ‘다시 보기’의 필요성이다. ‘90년대 문학’ 혹은 ‘2000년대 문학’으로 ‘종합’될 수 있는 동질적인 문학장 속에는, 다른 한편으로 하찮은, 하지만 결코 제거할 수 없는 이질성들이 유령처럼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하찮은 차이들’에까지 주목하기 위해선 아마도 우리문학에 대한 재미있고 활기차며 뻑적지근한 사랑, ‘불타는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매개해줄 수는 있는 사랑 말이다. 지젝과 엘비스의 이런 노래처럼. “당신이 나에게 불을 놓았고, 내 머리는 불타고 있어요!”(You gonna set me on fire. My brain is fla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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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2005년의 번역 트렌드(인문학)

한 해를 정리하는 12월에 들어서 교수신문(www.kyosu.net)에서는 '학문분야별 번역트렌드 점검'이라는 기획특집기사를 냈다. 인문학과 자연/사회과학으로 나누어 두 차례 기사가 게재되었는데, 시의적절한 내용이어서 옮겨놓고 몇 마디 보태본다. 먼저 옮기는 '인문학' 트렌드는 이은혜 기자의 12월 02일자 기사이다.   

 

 

 

 

-서양철학 쪽의 올 한해 번역물들을 훑어보면, 그간 해당전공자들이 전집, 선집번역을 비롯 한 사상가의 사상을 모두 번역해내겠다는 의지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작업들이 많았다. ‘니체 전집’의 완간(2, 6, 9, 12, 19권은 올해 출간)이 대표적인 예이고, 하이데거의 번역(<이정표>, <사유란 무엇인가>)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베르그손 저서도 두권(<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번역됐고 헤겔(<정신현상학 1~2>, <청년헤겔의 신학론집>) 역시 시장에서 인기가 별로 없는 것과는 별도로 꾸준히 번역되는 중이며, 칸트(<윤리형이상학 정초> 외)도 마찬가지로 전공자들이 나서서 완성된 그림을 위해 내달리는 중이다.

이 원전 번역서들의 특징은 기사에서의 지적대로 '해당전공자'들의 노작이라는 점이다. 칸트, 헤겔, 니체, 하이데거, 베르그손(베르그송) 등 사유의 거장들의 주저들이 계속 한국어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추세는 말할 것도 없이 반가운 일이다. 다만, <정신현상학>의 경우, 노학자가 세 차례나 개정 번역서를 내는 동안에 젊은 전공자들이 한번도 손을 거들지 못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면서 의아한 일이다. 우리는 아직 우리 세대의 정신현상학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기에 그러하다(가질 필요가 없는 것일까?).   

 

 

 

 

-그런 가운데, 최근 붐을 이루려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 발터 벤야민의 저술 번역이다. 올해 드디어 그의 주저인 <아케이드 프로젝트>(조형준 옮김, 새물결) 1차분 2권이 번역되어 나온 것. 벤야민은 1980년대 초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소개되면서 국내에서 연구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현대사회와 예술> 등 몇 권의 역서가 출간된 바 있다. 하지만 중역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얼마 후 이러한 번역작업도 뚝 끊겼다. 이후 벤야민의 저서보다는 2차 연구서들이 소개되기에 바빴다. 즉 국내에선 미국을 통해 들어온 벤야민을 맛봐야 했으며, 모더니티 담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에도 신비스럽고 난해한 이론가로 취급됐었다. 그러던 차에 올해 벤야민이 “나의 투쟁, 나의 모든 사상의 무대이다”라고 말한 13년간의 역작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나온 것. 더불어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김남시 옮김, 그린비)와 2차 연구서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효형)도 출간됐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번역의 質이다. 사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번역자는 벤야민 전공자가 아니며, 영어전공자라는 점에서 연구자들의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하다. “영어중역의 혐의가 제기되며 향후 번역 논쟁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라는 게 몇몇 전공자들 견해다. 어쨌든 논쟁의 불씨를 안고 있는 가운데, 벤야민의 다른 주 저서들의 번역에 전공자들의 박차가 가해지고 있다. 현재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 윤미애 중앙대 강사, 김영옥 한국여성개발원 연구원이 뜻을 모아 주어캄프판 10권을 출간계획하고 있는데, 늦어도 내년 1월 내에 <일방통행로>와 <사유이미지> 등 3권이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될 예정이라 한다. 이들은 아포리즘에 관한 벤야민의 주저로 파격적인 실험을 보여주고 있고 국내엔 처음 소개된다. 앞으로 1년에 3권씩 벤야민 번역서가 출간될 계획이다. 

벤야민에 대해서라면 한 해 동안 남못지 않게 주절거린 터여서 군말을 덧붙이기가 쑥쓰럽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경우 아직 나머지 절반이 출간되지 않았지만 올해의 '사건'이라고 할 만한 번역이다. 중역본 논란은 전공자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일 텐데(원전역이라고 해서 무조건 '질'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내년에 출간예정이라는 벤야민 전집에 기대를 걸어본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건 번역의 문제점을 제기한 '전공자'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번역이 그만한 수준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영어를 직접 옮길 게 아니라 독역본을 중역했어야 했을까?).  


 

 

  

-고대철학 부문에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번역 역시 국내 학계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애초에 플라톤전집을 번역하려고 모였던 정암학당 멤버들이 우선 단편선집부터 선보인 것. 워낙 번역이 쉽지 않은 분야임에도 김재홍 서울대철학사상연구소 연구원 등 3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 원전번역을 진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2006년 학술진흥재단 번역과제로 김남두 서울대 교수가 플라톤의 마지막 대화편 <법률(Nomoi)편>을, 조대호 연세대 교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맡게 됐다. 하지만 몇몇 아쉬움을 나타내는 목소리도 있다. 김주일 성균관대 강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피지카(Physica)>도 중요 저작인데 아직 번역서가 없으며, <정치학>의 재번역이 나오지 않는 것도 아쉽다”라고 말한다. 롱 앤 새들리(Long & Sedley)의 것도 “교양적 수준’에서 반드시 번역되어야 할 책들”이라는 의견들이 제기된다. 이들 역시 헬레니즘 철학을 위한 증언과 단편 모음들인데, 유럽에는 포켓판으로 널리 공급되고 있다는 것. 그 외 장 볼락(Jean Bollack)의 엠페도클레스 단편 모음 및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에 대한 개괄서인 <엠페도클레스(Empedocle 1~3)> 역시 “번역됐으면” 하는 저서로 꼽히기도 한다. 어쨌든 현재 플라톤 전집조차 완간되지 못한 서양고대철학계의 부끄러운 현실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플라톤의 <국가>만 십 수종 번역된 데서 알 수 있듯이 특정 인기종목에만 번역이 편중된 탓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조대호 교수의 <형이상학> 번역은 작년에 나온 발췌역을 가리키는 것인가? 한가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연초에 나온 <범주론/명제론>(이제이북스)이다. 어쨌거나 서양 고대철학 분야에서도 전공자들이 분발하고 있다는 소식이니 고무적이다. 현재 나와 있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나 <정치학>을 업그레드한 번역서의 등장은 나 또한 고대하고 있고. 더불어 문학 전공자로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또한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 입문서로 추천할 만한 만화책이 최근에 출간됐다. 루퍼트 우드핀의 <아리스토텔레스>(김영사). 이 역시 전공자의 번역이므로 믿을 만하겠다.  

 

 

 

 

-들뢰즈 서거 10주년을 맞아 올해 들뢰즈 관련 번역도 화려했다. 저서로는 <중첩>(허희정 옮김, 동문선), <비물질노동과 다중>(서창현 외 옮김, 갈무리)이 번역됐고, <들뢰즈와 맑스주의>(니콜래스 쏘번 지음, 조정환 옮김, 갈무리), <들뢰즈와 정치>(폴 패튼 지음, 백민정 옮김, 태학사), <들뢰즈 커넥션>(존 라이크만 지음, 김재인 옮김, 현실문화연구), <싹트는 생명-들뢰즈의 차이와 반복>(키스 안셀 피어슨 지음, 이정우 옮김, 산해),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데이비드 노먼 로도윅 지음, 김지훈 옮김, 그린비) 등 2차 연구서도 번역돼 들뢰즈 연구가 풍부해진 한해였다. 원래 ‘10주년’이란 타이틀이 그러하듯 때맞춰 준비해뒀다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지만, 사실 국내 철학계는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가 과도한 트렌드를 이루고 있다”라는 일부 학자들의 우려를 염두에 둔다면 과도한(?) 붐을 이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출간된 책들의 종수로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디알로그>(동문선, 2005)가 리스트에서 누락됐다) 국내에서 들뢰즈는 '트렌드 중의 트렌드'이다. 내 기억에, 90년대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마르크스주의 이후, 혹은 또다른 마르크스주의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알튀세르-푸코-들뢰즈는 차례로 한국의 지식분자들 사이에 '냄비'가 되었다(니들이 들뢰즈를 알어?). 그 긍정적인 효과는 이들의 책들이 단기간에 대거 소개된 것이며 그 부정적인 결과는 상대적인 편식에 따른, 사회적 관심의 불공정한 분배이다('과유불급'은 동양의 오랜 격언이다).

<들뢰즈 커넥션>을 읽은 걸 계기로 해서 (아직 미뤄둔 페어퍼들이 많지만) 나도 들뢰즈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참견을 해왔다. 그리고 <중첩>을 빼고는 올해 나온 책들은 모두가 몇 장이라도 책장을 넘겨본 책들이다. <비물질노동과 다중>은 편역서로서 '정동(affect)'에 대한 들뢰즈의 강의를 포함하고 있지만 들뢰즈의 '저작'은 아니다. <들뢰즈 맑스주의>와 <들뢰즈와 정치>는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이며, <들뢰즈의 시간기계>는 물론 올해 2권이 마저 출간된 <시네마>와 같이 읽어야 하는 책이다. <싹트는 생명>은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책. 해서, 들뢰즈를 읽는 것만으로도 한 해가 모자랄 지경이다. 어쩌다가...   

 

 

 

 

-한나 아렌트의 저서들 역시 번역의 물살을 꾸준히 타고 있다. 올해에는 <과거와 미래사이>(서유경 옮김, 푸른숲)가 출간됐는데, 이로써 아렌트 저서가 8권이 번역출간 됐다. 곧이어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정치(학)의 약속> 등도 번역될 예정이라 하는데, 아렌트 주저가 거의 완간을 눈앞에 둘만큼 번역이 활발한 수 있었던 건 1995년 즈음 아렌트 재조명이 해외에서 이뤄지면서 국내에서도 관심을 끌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들이 곧 아렌트 번역에 부지런히 뛰어들었던 것. 물론 서유경 경희대 교수 등은 “일본은 아렌트 학회도 있고 저술도 1970년대 이미 다 번역됐다”라면서 국내 상황이 매우 뒤쳐졌음을 질타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2차 연구서번역에는 전공자들도 손길을 뻗치지 못하고 있다. <아렌트와 하이데거> 등 주요 연구서 한둘은 나왔지만, 그 외 중요한 연구가인 벤하비브, 번슈타인, 카노반 등의 연구물들이 국내에 소개돼 아렌트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면 시간을 좀더 두고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작년에 <혁명론>과 <정신의 삶>(1권)이 출간된 데 이어서 아렌트 번역은 "물살을 꾸준히 타고 있다." 개인적으로 반갑다(나는 아렌트의 책들을 준-전공자 수준으로 갖고 있다). 아렌트에 대해서도 많이 주절거린 바 있으므로 새삼 소개하는 건 번잡스럽다. 그녀의 주저들이 곧 마저 출간된다고 하니까 기다려볼 일이다. 주요 연구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언급된 번슈타인은 '리처드 번스타인'을 말하며, <현대정치사회이론>(나남, 1988), <존 듀이 철학 입문>(예전사, 1995),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보광재, 1996) 등의 저작이 번역돼 있다(<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번역도 아주 훌륭한 책이다).

 

 

 

 

-철학 쪽에선 재탕삼탕 번역돼 출판시장을 불균형하게 만드는 단골메뉴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쇼펜하우어의 저서들도 그에 속할 테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상록>은 올해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역서(숲 刊)가 나옴으로써 “오랜만에 제대로 된 번역이 나왔다”는 평을 얻고 있다.(*천병희 교수는 올해만 해도 여러 권의 역서를 출간했다. 후학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한편, 알려진 명성에 비해 정작 저서들은 별로 소개되지 않아 연구자들의 아쉬움을 사는 사상가들도 있다.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예다.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는 “비트겐슈타인 논문이나 해설서는 많은데 정작 저서들이 많이 번역되지 않고 있다”라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또 프랑스 철학자 중 “자크 랑시에르나 필립 라부-라바르트의 책들이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는 건 이상하다”라는 의견도 있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책들은 댓 권 정도가 번역돼 있다. 물론 많은 수는 아니지만('노트'들을 제외하면 그가 많은 책들을 썼나?), 소위 '주저'라는 책들은 소개돼 있는 형편이다. 연구서들은 더 많이 나와 있지만. 무엇이 더 번역되어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자크 랑시에르나 라쿠-라바르트('라부-라바르트'는 오타이다) 알랭 바디우, 장-뤽 낭시와 더불어 '데리다 이후'의 프랑스 철학을 이끌고 있는 철학자들이며,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랑시에르의 책들은 대개가 짧기 때문에 번역/소개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듯하다.

 

 

 

 

-신화학에선 드디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임봉길 옮김, 한길사) 1권이 번역돼 나왔다. 총 4권인데 내년에 2권이 출간될 예정. 그간 레비-스트로스는 <슬픈열대>, <야생의 사고> 등이 널리 읽혀왔지만, 사실 이들은 그의 사유과정 중에 나온 저서들이며,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이 집약된 가장 중요한 책은 <친족의 기본구조>와 <신화학>이다. <신화학>은 아직 일본에서도 번역되지 못했으며, <친족의 기본구조> 역시 너무 어려운 작업이라 국내에선 번역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올해 레비-스트로스의 사유들이 담긴 <보다-듣자-읽다>(고봉만 외 옮김, 이매진)도 번역돼 나왔는데, 어쨌든 이러한 주변적 저서들을 맛보며 주요 저서 번역은 좀 기다려야 할 상황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이 모두 출간된다면 이 또한 '사건'이 될 것이다. 그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인 <친족의 기본구조>가 그의 주저이긴 하지만, 김형효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에 잘 정리돼 있으며, 일반 교양서로 읽힐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다. 제대로 레비스트로스를 읽자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부터 읽어야 한다. 이 또한 상당한 견적을 자랑하는 일이다. 일반 독자들로선 대담 자서전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2003)로 대강 카바하는 수밖에.  

  

-종교학에서는 엘리아데의 역작 <세계종교사상사 1~3>(이용주 외 옮김, 이학사)가 빛을 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종교학계의 거장 엘리아데의 사상은 국내에 거의 다 소개된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사상의 ‘다양성’을 맛보여줘야 한다는 것. 그간 국내에선 엘리아데가 우뚝 솟아있었고, 그 주위로 윌리엄 페이든과 니니안 스마트 정도의 저서만이 번역 소개됐을 따름이다. 그러던 차, 올해 처음으로 반갑게 접한 얼굴이 브루스 링컨이다. 그의 <거룩한 테러>(김윤성 옮김, 돌베개)가 출간됐는데, 엘리아데의 제자이면서 그와는 다른 이론적 입지를 구축한 저명한 종교학자임에도 그간 국내에선 번역된 바가 없었던 것. 김윤성 한신대 교수는 “종교학과 학부생들이나 대학원생들에겐 기본 커리큘럼에 속하며, 인문학적 관심사에서도 읽어봐야 할 책인데 그동안 번역상황이 너무 척박했다”라고 덧붙인다. 사실 그의 이론적 입지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주저로는 ‘Discourse and the Construction of Society’와 ‘Authority’를 꼽을 수 있는데, 이는 향후 종교학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엘리아데의 <세계종교사상사> 출간은 물론 '사건'에 속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기사에서 개인적으로 유익했던 건 브루스 링컨에 대한 정보. 그가 엘리아데의 제자였다는 것. 확인해보니 링컨은 시카고대학 종교학과에서 학위를 받고 현재 교수로 일하고 있다. 엘리아데는 종교학에 있어서 '시카고 마피아'의 대부였다. 링컨의 책들도 더 번역되기를 기대해본다.  


 

  

 

 

한편, 엘리아데와 마찬가지로 루마니아 출신의 걸출한 염세주의자 에밀 시오랑의 책들이 올해엔 소개되지 않은 게 유감이다(작년엔 <독설의 팡세>가 나왔었다. 원제는 <고난의 삼단논법> 혹은 <고뇌의 삼단논법>). 올해는 들뢰즈 사망 10주년이기도 하지만, 시오랑(1911-1995) 사망 10주년이기도 하다. 이 해가 가기 전에 시오랑에 대해서 몇 마디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05.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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