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 개정판, 한국어판 후기 및 해제 수록
노마 필드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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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이었다아시안게임이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열렸다마라톤 경기가 있었다올림픽이나 대부분의 아시안게임에서 마라톤의 골인 지점은 메인 스타다움이지만 이때는 좀 달랐다. ‘평화의 공원’.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를 기념하는 공원이었다히로시마에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것도이목이 집중되는 장면을 평화의 공원으로 정한 것도 일본의 속내는 분명했다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아니라 전쟁으로원폭으로 피해를 입은 나라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싶어 하는.

 

그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우승을 차지했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이어 아시안게임까지 석권한 황영조 선수였다통쾌했다공원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다니는 모습은 자랑스러웠다하지만 또 씁쓸했다.

 

이 오래된 장면을 떠올리게 된 건 노마 필드의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를 읽으면서다.

 

미국인 아버지일본인 어머니를 둔 노마 필드(그녀는 어린 시절을 일본의 미국인 학교에서 보냈고대학 이후 미국에서 지냈다)가 1년간 외가에서 지내기 위해 1988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들어온다마침 그때는 히로히토가 사경을 헤매는 시기였다사회는 자숙의 분위기였다연하장 보내는 것도 자제할 정도로노마 필드는 일본과 천황전쟁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된다그 매개로 세 명의 인물을 만나고대화와 그들의 이야기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했다그 기록이 바로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이다.

 

첫 인물은 1987년 오끼나와에 열리는 국민체육대회(우리나라의 전국체전)에서 일장기를 끌어내리고 불태운 슈파마켓 주인 치바나 쇼오이찌다그 사건에는 오끼나와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관련한 역사적 의미가 있었고일장기라는 상징의 의미도 함께 얽혀 있었다그와의 대화는 전쟁 와중에 벌어졌던 집단 학살천황을 정점으로 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국가의 존재 의미에 대한 질문 등으로 이어진다그리고 요미딴촌의 개발이 가져오는 파급까지.

 

두 번째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자위대원 남편의 신사 합사를 거부한 야마구찌의 평범한 주부 나까야 야스꼬였다일본 총리가 참배하는 것으로 늘 문제가 되는 야스쿠니 신사말고도 일본 전국에는 신사가 많다종교이면서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이상한그럼에도 국가로부터 보호받고 후원받는다가족의 동의 없이 신사에 합사하여 호국영령으로 추앙받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 나까야 야스꼬는 반대했다오랜 재판 끝에 패소를 했고그 판결은 의미를 지니게 됐다일본의 군국주의와 결탁한 종교 단체가 있었고소수 종교에 대한 처우 문제가 제기됐고일본 사회에서 열악한 여성의 지위 문제도 드러났다일본의 헌법에 내세우고 있는 신앙의 자유와 정교 분리 조항이 불완전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그 거대한 불합리한 구조에 한 조그만 가정 주부가 도전을 하였고법원에서는 패배했지만그 의미를 널리 알렸던 것이다.

 

세 번째는 천황이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밝힌 나가사끼 시장 모또시마 히또시다우리가 보기에는 이 당연한 발언이 일본의 공적 인물이 공개적으로 답변한 것은 처음이었다니그리고 그로 인해 전국적인 항의가 빗발쳤다니물론 그에 대한 감사와 응원의 편지도 쇄도했고이는 그래도 깨어있는 이들이 일본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줬다살벌한 위협이 있었고심지어 총격 사건으로 생명이 오가는 위험까지 있었지만모또시마 히또시 시장은 굴복하지 않았고한번 더 시장직에 선출되었다(그리고 2014년 사망했고그 소식이 우리나라에도 보도됐다).

 

이렇게 세 명과의 만남이지만사실은 한 명이 더 있다바로 노마 필드 자신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겪었던 정체성 문제에 대해서자신의 가족들과 연관되어 확장되어 바라보게 되는 일본의 폐쇄적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깊게 성찰하고 있다세 명의 만남과 대화와는 별로도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죽어가던 천황은 1989년 1월에 사망했다(몇몇 신문을 빼고는 모두 붕어(崩御)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그는 끝까지 전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그렇게 쇼와 시대가 가고 헤이세이 시대가 왔었다그리고 2019년 5월부터는 나루히토 시대가 열리면서 레이와라고 한다시대가 어느 때인데은행에서도 우체국에서도학교에서도 아예 문서에 그 연호가 인쇄되어 나온다단지 국가의 특성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찜찜하다그들에게는 아직도 과거에 대한 향수가 짙은 모양이다.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을 당연히 일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며 읽었지만일본을 넘어서 더 보편적인 것을 생각했다우리는 어떤가노파 필드가 인터뷰한 세 사람이 지적하고노파 필드가 고민하는 그 내용들에 우리는 자유로운가절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1989바로 그 시점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제목을 가진 책이지만 여전히 읽히고 읽혀져야 하는 책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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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비교 통사 - 역사상의 재정립이 필요한 때
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박은영 옮김 / 너머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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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지마 히로시는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에서 자신이 한국사를 연구하게 된 동기와 한국으로 건너오게 된 사연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그와 함께 자신이 연구한 한국의 역사에 대한 시각을 어렵지 않게 보여주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소농사회론’은 물론, 양반이라는 신분에 대한 새로운 시각, 호적과 족보에 대한 연구도 소개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한국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동아시아의 특성과 논리에 걸 맞는 동아시아사(史) 정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중일 비교 통사》는 바로 그런 자신이 생각하는 새로운 동아시아상을 찾기 위한 시도다. 한국, 일본, 중국의 각각의 국가의 역사에 매몰되지 않고, 비교사를 통해 각국을 이해하고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이해는 보다 정확할 수 있으며, 보편적일 수 있으며, 또한 특징을 또렷이 부각시킬 수도 있다. 또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면이 넓어질 수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이런 방식에 동의한다.


책은 2개의 부분으로 되어 있다. 1부는 14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의 한, 중, 일 동아시아에 대한 통사이고, 2부에서는 자신의 학설인 소농사회론에 대한 세부 연구를 논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2부가 각국의 집약적 농업의 성립, 국가의 토지 파악 방식 등 상대적으로 전문적인 분야를 논하고 있어, 1부의 통사가 훨씬 재미있고, 잘 읽힌다. 그리고 “한중일 비교 통사”라는 책 제목과도 잘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를 대체로는 시간 순으로 교차시키며 쓰고 있으면서, 주제라는 측면에서도 대체로 일치시키면서 서로 비교하고 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정치 변동 속에서 탄생한 명, 조선, 무로마치 막부의 얘기에서, 이후 생산 구조와 생활 방식의 변화, 16세기 유럽 세력의 등장과 더불어 비롯된 동아시아 사회의 유동화(그리고 일본의 조선 침략), 만주족에 의한 청나라의 등장과 동아시아 삼국의 국가 체제의 비교 등을 서술하고 있으며, 근대 바로 직전까지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 통사 부분은 모든 부분이 흥미롭지만,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5장이다. 여기서는 삼국의 사회와 문화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삼국의 지배 세력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중국의 사대부(우리의 사대부와는 좀 다르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조선의 양반, 일본의 무사가 어떤 차이가 있으며, 로 인해서 지배 구조와 사회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친족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종족(중국), 문중(조선), 이에(일본) 등으로 그 의미와 범위, 역할이 비슷하면서도 분명하게 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의 형성도 서로 달랐으며, 농촌의 구조도 달랐다. 그리고 주자학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랐던 이유에 대해서도 제시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 일본이 동아시아라는 범주에서 동일하게 이해해야 하는 측면과 함께 각국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상당히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일본과 중국의 역사관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과 동시에 한국의 역사학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역사 연구에 대해서는 좁은 시야를 비판한다. 근현대사의 특수성으로 중국이나 일본과의 관련성을 중시하는 것이 정체론이나 타율적 발전론과 연결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한국사의 전개를 지나치게 왜소화시켰고, 연구의 쇄국화를 초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시야를 넓혀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총체적이고 발전적인 시각을 가질 것을 제안하고 있다.


여전히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대를 겪고 있다. 서로 협력해야 할 필요성은 증가하고 있지만, 갈등은 심해지고 있다. 물론 갈등이 내부의 결속을 다질 수 있는 계기를 줄 수도 있고, 분명히 잘못된 상황에 대한 결기 있는 대처도 필요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무한정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선은 동아시아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이에 대해 사명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사명감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명감의 결실이자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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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 (특별판 리커버 에디션, 양장) - 복잡한 세상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심리법칙 75
장원청 지음, 김혜림 옮김 / 미디어숲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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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이치를 몇 가지 법칙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이치를 설명하는 법칙의 명칭을 외우고 있을 필요도 별로 없다(가끔 있을까?). 하지만 그 법칙이 알려주는 세상의 이치는 충분히 숙고할 필요가 있다. 세상을 효율적으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말이다.

 

장원청의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는 심리학에서 나오는 75가지의 법칙을 소개하고 있다. 그 법칙 내지는 효과가 나오게 된 실험과 그것이 적용된 사례들을 소개한다. 참 많다. ‘효과라고 이름 붙은 것들을 가져와 보면, ‘미러링 효과’, ‘앵커링 효과’, ‘웰렌다 효과’, ‘쿨레쇼프 효과’, 브루잉 효과‘, ’양떼 효과‘, ’바넘 효과‘, ’걷어차인 고양이 효과‘, ’헤라클레스 효과‘, ’호손 효과‘, ’벼룩 효과‘, ’발라흐 효과‘, ’퇴행 효과‘, ’삶겨 죽은 청개구리 효과‘, ’마태 효과‘, ’플라시보 효과등등.

 

그 밖에도 법칙이라 이름 붙은 것들도 있고, ‘뷔르당의 당나귀식으로 불리는 것도 있으며, ‘밀그램의 실험’, ‘죄수의 딜레마’, ‘돼지 게임’, ‘슈와르츠의 논단처럼 일컬어지는 것도 있다. 그 명칭만으로는 무언가를 알 수는 없지만, 익숙한 것도 있고, 아주 낯선 것도 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알고 있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심리학의 대가였단 말인가? 그건 아니다. 그냥 알고만 있을 뿐 그것을 내 삶과 연결시키고 있지 못하고 있고, 들었을 때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을 뿐인 경우가 많다.

 

서로 모순되는 것도 없지는 않다. 이를테면, ‘초두 효과최신 효과’, ‘문간에 발 들여놓기 효과문간에 머리 들여놓기 효과같은 것들은 분명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상황에 따른 대처를 얘기하는 것이지 서로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많은 실수들은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과 생각을 해서 나오는 것이다.

 

많은 얘기들을 하고 있지만, 장황하지 않아서 잘 이해되는 이 심리학의 법칙과 효과 들 중 낯설었던 한 가지만 소개한다.

바로 돼지 게임(Boxed pig game)’이다. ‘뷰티플 마인드로도 유명한 경제학자 존 내쉬가 처음 제기했다고 하는데, 한쪽에는 돼지 먹이통을, 다른 쪽에는 돼지 먹이 공급을 제어하는 버튼을 설치한 돼지 우리를 가정한다. 돼지 우리에는 큰 돼지와 작은 돼지 두 마리가 있고, 버튼을 밟으면 10개의 통으로 나눠진 돼지 먹이가 공급된다. 큰 돼지는 최대 9통의 먹이를, 작은 돼지는 최대 4통의 먹이를 먹을 수 있는데, 버튼을 밟았을 때 각각 2통 이상의 먹이를 먹어야만 체력을 보충할 수 있다. 존 내쉬의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누가 버튼을 밟으러 가야할 것인가?

큰 돼지가 2가지의 선택권이 있다. 하나는 먼저 버튼을 밟고 6통의 먹이를 먹고, 다른 하나는 작은 돼지가 버튼을 밟고 오기를 기다리면서 9통의 먹이를 먹는 것이다(버튼을 밟으러 가면 그 사이에는 먹이를 먹을 수 없으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작은 돼지 역시 2가지 중 선택을 할 수 있다. 그 두 가지 선택 중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버튼을 밟으러 가면 그 사이에 큰 돼지가 9통의 먹이를 먹어버리고, 자신은 남은 1통의 먹이를 먹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통은 체력 유지에 모자란 양이다.

그러므로 작은 돼지는 자신이 버튼을 밟으러 갈 수 없다. 그렇다면 큰 돼지의 경우는 자신이 버튼을 밟으러 가고 6통의 남은 먹이를 먹어야 하는 선택만이 남는다.

 

저자는 이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돼지 게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경쟁의 약자는 반드시 경쟁 전략을 (선택 보류) 연구하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207)

 

작은 돼지의 행복은 기다리고, 힘을 비축하는 데서 온다. 큰 돼지는 나무를 심고, 작은 돼지는 그저 바람을 쐬다 기회를 봐서 치고 올라가야 하는... 사실 행복이라기보다는 비정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세상 이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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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드림스 - 약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바꾸는가?
로렌 슬레이터 지음, 유혜인 옮김 / 브론스테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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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에 관한 병을 색깔로 연상해보자면, 당연히 ‘블루(blue)’다. ‘파랑’이라고 하면 그 느낌이 나지 않는, ‘블루’. 정신병 치료약의 역사를 보면, 최초의 정신병 약이라고 할 수 있는 소라진(Thorazine)은 메틸린블루에서, 최초의 삼환계 항우울제인 이미프라민(Imipramine)은 섬머블루 혹은 스카이블루라고 불리는 염료에서 기원했다. ‘블루’는 그쪽과 뗄 수가 없는 색, 아니 이미지다.

작가이자 심리학자인 로렌 슬레이터는 35년 동안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치료를 받았고, 어느 때부터는 약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다. 온갖 부작용에 시달리고, 복용하던 약의 효과가 떨어져서 다른 종류의 약으로 바꾸면서도 자신의 병이 어떤 원인인지 알지 못하며, 또한 복용하는 약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른다. 그런 그녀가 정신과의 약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듣고 다닌 것이다.

일단 그녀는 정신과 약의 역사를 흥미 있게 보여주고 있다. 1950년대 등장해서 정신병동의 환자 수를 극적으로 줄여준 소라진에서 시작하여, 이미프라민 등의 삼환계 항우울제, 우울증 치료제로 대박을 친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인 프로작(Prozac), 사랑의 묘약이라 불렸던 엑스터시(Ecstacy), 환각 버섯에서 유래한 실로사이빈(Psilocybin), 그리고 속임수약이라 불리는 플라세보와 뇌에 전기 자극을 주는 이물질을 심는 뇌심부자극술까지. 그 약들이 어떻게 탄생했으며, 어떤 경로를 통해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약으로 등극했으며, 또 어떤 논란이 있는지, 어떻게 금지되었는지 등등에 대해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증상과 처방받았던 약들의 종류들, 그때의 느낌들 등등. 이 부분에서는 매우 문학적인데도 정신과 약들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와 따로 떼어 놓지 않고, 그 이야기들과 자신의 이야기들을 연결시켜 놓고 있다. 자신의 역사가 정신과 약들의 역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얘기이며, 약들의 한계가 바로 자신의 병의 문제라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가슴이 아파온다.

이 책에는 놀라운 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한 가지는 지금 정신과의 약으로 쓰이고 있는 것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하기야 정신 질환에 대한 진단도 생물학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여러 가설이 등장했던 사라졌다. 도파민의 수치가 높으면 조현병이라고 했지만, 연구 결과 도파민 수치와 조현병 사이에는 관련성이 거의 없었다. 이후에는 세로토닌이 너무 적으면 우울증이 온다고 했지만(많은 책들이 그렇게 설명한다), 그래서 프라작같은 세로토닌의 양을 늘려주는 약을 성배로 떠받들었지만 우울증 환자이면서 세로토닌의 양이 많은 사람도 있고, 안정된 사람이 세로토닌을 적게 갖는 경우도 있다. 즉, 우리는, 아니 의사들도, 연구자들도 잘 모르고 있다. 더군다나 여러 정신과 약들이 작용하는 메커니즘도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의사들은 처방하고, 환자들은 복용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처방에 잘 듣고, 또 어떤 사람은 효과가 없다. 효과가 있었던 약이 점점 효과가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병이 재발하면 이전의 약이 듣지 않기도 한다. 아직 잘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얘기는 이른바 사이키델릭이라고 하는 약들에 대해서다. 엑스터시나 실로사이빈 같은 우리는 간단히 마약으로 취급하는 약들에 대한 긍정성이다(“나는 정신약리학의 다음 황금기가 사이키델릭과 함께 찾아올 것이라 본다.”). 이런 긍정적 평가는 다른 책에서도 접한 바가 있는데, 그때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반복해서 이런 내용을 반복적으로 접하고 보니 과연 어떤 문제가 있었으며,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이고, 또 앞으로 이에 대해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매우 궁금해진다.

이 책은 단순히 정신과 약의 역사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책이 아니다. 그 역사를 통해서 정신병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하고, 그 병을 앓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공감하도록 하며, 정신과 약들의 의미와 미래를 생각해보도록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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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린 해부학자입니다 - 기린 덕후 소녀가 기린 박사가 되기까지의 치열하고도 행복한 여정
군지 메구 지음, 이재화 옮김, 최형선 감수 / 더숲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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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8년 전에 재미있는 논문을 본 적이 있다최고의 과학저널이라고 하는 <Nature>지의 자매지인 <Nature Communications>지에 나온거북이의 등딱지의 구조를 밝힌 논문이었다(http://blog.yes24.com/document/7332939). 결론을 얘기하자면 거북이의 등딱지는 가슴뼈에서 발달했다는 것이다즉 내골격이라는 것인데그 논문을 읽으면서 든 내 생각은 좀 복잡미묘했다재밌다는 생각도 들었고이런 연구가 이런 좋은 저널에도 실리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그리고 이런 연구도 하는구나 생각도 들었는데이런 어쩌면 소용을 찾지 못할 연구를 진지하게 하는 연구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또 소중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군지 메구의 나는 기린 해부학자입니다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그와 비슷했다이제 서른을 갓 넘은 젊은 과학자가요새 핫한 분자생물학이니 뇌과학이니아니면 독서계에서 좀 팔리는 진화학에 관한 책이 아니라 기린 해부학에 관한 책을 낸 것부터가 야릇했다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야 특이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기린 연구를 하고 싶다고 교수의 세미나를 들은 후 들이민 사연도 흔하지는 않지만그럴 수 있다고 본다그런데 진짜 기린 연구그것도 기린 해부학을 전공했다는 것은..., 그리고 그가 연구하고 밝힌 내용은...

 

그녀가 기린 해부를 통해 밝힌 새로운 사실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의 주요 내용이자 이 책의 주요 내용은 기린에서 1번 가슴뼈(흉추)가 8번째 목뼈(경추)로 기능한다는 것이다(아주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포유류의 목뼈는 7개다). 30마리에 이르는 기린을 해부하면서 얻어낸 발견이었다.

 

기린의 목에 대해서는 나도 관심이 없지 않았었는데박사학위를 받기 전 진화학에 대해 강의를 나갔던 적이 있는데그때 강의를 위해서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던 것 중에 하나가 기린의 목이 그처럼 길어진 데 따른 이득이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따먹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나뭇잎보다 물이 생명에 더 중요한 것인데나뭇잎을 먹는 데 따른 적응으로 기린의 목이 그처럼 길어졌다면 물을 먹을 때의 그 불편한 자세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그러면서 그 진화학 책에서는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는데 바로 싸움이었다기린의 긴 목이 수컷 사이의 싸움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이는 군지 메구의 이 책에서도 수컷의 머리가 암컷의 것에 비해 훨씬 무겁고 싸움(넥킹necking이라고 한다)에 쓰인다는 내용으로도 나온다). 오래 전에 강의했던 것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내용인데그것 때문에라도 군지 메구의 연구는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것이었다(물론 군지 메구가 발견한 ‘8번째 목뼈는 그 진화학 책의 가설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동성이 높은 ‘8번째 목뼈는 상하 방향으로 목의 가동 범위를 확대해높은 곳의 잎을 먹고 낮은 곳의 물을 마시는 기린 특유의 상반된 두 가지 요구를 동시에 만족하게 했다.” (195)

 

첫 해부에서부터(당연히 헤맸다그런 발견을 하기까지의 과정그리고 그 이후 생각하고 있는 새로운 연구 주제에 대핸 얘기가 이 책에서 그녀가 하고 있는 얘기의 거의 전부다그러니까 어쩌면 상당히 좁은 범위의 전문적인 내용이기도 하고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하다그리고 거북이의 등딱지에 관한 논문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이런 연구를 하는 사람이 있구나이런 즉각적인 소용을 찾을 수 없는 연구를.

 

하지만 이 얇은 책에는 저자의 열정과 자부심이 잔뜩 들어 있다당연히 일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최대한 쉬운 말로 쓰려고 노력은 하지만어쩔 수 없이 흥분을 주체 못하여 전문 용어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고새해 첫날 기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해부하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나가는 모습과 그 심정에서 그녀가 연구를 얼마나 진지하고 즐겁게 대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가 있다.

 

어쩌면 이런 게 과학하는 사람이 본 모습이 아닌가 싶다그녀는 기린을 연구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런 해부학자는 온 세상을 뒤져 봐도 어디에도 없다틀림없이 나 하나뿐이다.”라는 자부심 역시 젊은 과학자의 패기가 느껴져 나도 기분이 좋다.

 

끝으로 이 얘기는 덧붙여야겠다왜 이런 연구를 해야 할까하는 것이다나도 박사학위를 정말 즉각적인 소용이 닿지 않는 연구를 통해서 받았다지금은 그렇지 않지만그렇다고 당장의 소용 닿는 연구만 하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군지 메구 박사는 이렇게 얘기한다기린이나 소나 양과 같은 동물을 표본을 만드는그것도 많이 만드는 데 ‘3()’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무목적무제한무계획’. 그냥 한다는 것이다지금 필요 없다 하더라도 100, 200년 후에는 필요할지도 모르니까(그때 필요하지 않더라도 상관 없다한다는 것이다쓸모없는 일로 여겨지는 연구를정말 열심히 열정을 가지고 자부심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이유다이런 사람이 과학을 해야 한다이 책을 덮으며 더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이런 과학을 충분히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답답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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