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린 해부학자입니다 - 기린 덕후 소녀가 기린 박사가 되기까지의 치열하고도 행복한 여정
군지 메구 지음, 이재화 옮김, 최형선 감수 / 더숲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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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8년 전에 재미있는 논문을 본 적이 있다최고의 과학저널이라고 하는 <Nature>지의 자매지인 <Nature Communications>지에 나온거북이의 등딱지의 구조를 밝힌 논문이었다(http://blog.yes24.com/document/7332939). 결론을 얘기하자면 거북이의 등딱지는 가슴뼈에서 발달했다는 것이다즉 내골격이라는 것인데그 논문을 읽으면서 든 내 생각은 좀 복잡미묘했다재밌다는 생각도 들었고이런 연구가 이런 좋은 저널에도 실리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그리고 이런 연구도 하는구나 생각도 들었는데이런 어쩌면 소용을 찾지 못할 연구를 진지하게 하는 연구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또 소중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군지 메구의 나는 기린 해부학자입니다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그와 비슷했다이제 서른을 갓 넘은 젊은 과학자가요새 핫한 분자생물학이니 뇌과학이니아니면 독서계에서 좀 팔리는 진화학에 관한 책이 아니라 기린 해부학에 관한 책을 낸 것부터가 야릇했다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야 특이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기린 연구를 하고 싶다고 교수의 세미나를 들은 후 들이민 사연도 흔하지는 않지만그럴 수 있다고 본다그런데 진짜 기린 연구그것도 기린 해부학을 전공했다는 것은..., 그리고 그가 연구하고 밝힌 내용은...

 

그녀가 기린 해부를 통해 밝힌 새로운 사실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의 주요 내용이자 이 책의 주요 내용은 기린에서 1번 가슴뼈(흉추)가 8번째 목뼈(경추)로 기능한다는 것이다(아주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포유류의 목뼈는 7개다). 30마리에 이르는 기린을 해부하면서 얻어낸 발견이었다.

 

기린의 목에 대해서는 나도 관심이 없지 않았었는데박사학위를 받기 전 진화학에 대해 강의를 나갔던 적이 있는데그때 강의를 위해서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던 것 중에 하나가 기린의 목이 그처럼 길어진 데 따른 이득이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따먹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나뭇잎보다 물이 생명에 더 중요한 것인데나뭇잎을 먹는 데 따른 적응으로 기린의 목이 그처럼 길어졌다면 물을 먹을 때의 그 불편한 자세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그러면서 그 진화학 책에서는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는데 바로 싸움이었다기린의 긴 목이 수컷 사이의 싸움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이는 군지 메구의 이 책에서도 수컷의 머리가 암컷의 것에 비해 훨씬 무겁고 싸움(넥킹necking이라고 한다)에 쓰인다는 내용으로도 나온다). 오래 전에 강의했던 것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내용인데그것 때문에라도 군지 메구의 연구는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것이었다(물론 군지 메구가 발견한 ‘8번째 목뼈는 그 진화학 책의 가설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동성이 높은 ‘8번째 목뼈는 상하 방향으로 목의 가동 범위를 확대해높은 곳의 잎을 먹고 낮은 곳의 물을 마시는 기린 특유의 상반된 두 가지 요구를 동시에 만족하게 했다.” (195)

 

첫 해부에서부터(당연히 헤맸다그런 발견을 하기까지의 과정그리고 그 이후 생각하고 있는 새로운 연구 주제에 대핸 얘기가 이 책에서 그녀가 하고 있는 얘기의 거의 전부다그러니까 어쩌면 상당히 좁은 범위의 전문적인 내용이기도 하고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하다그리고 거북이의 등딱지에 관한 논문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이런 연구를 하는 사람이 있구나이런 즉각적인 소용을 찾을 수 없는 연구를.

 

하지만 이 얇은 책에는 저자의 열정과 자부심이 잔뜩 들어 있다당연히 일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최대한 쉬운 말로 쓰려고 노력은 하지만어쩔 수 없이 흥분을 주체 못하여 전문 용어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고새해 첫날 기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해부하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나가는 모습과 그 심정에서 그녀가 연구를 얼마나 진지하고 즐겁게 대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가 있다.

 

어쩌면 이런 게 과학하는 사람이 본 모습이 아닌가 싶다그녀는 기린을 연구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런 해부학자는 온 세상을 뒤져 봐도 어디에도 없다틀림없이 나 하나뿐이다.”라는 자부심 역시 젊은 과학자의 패기가 느껴져 나도 기분이 좋다.

 

끝으로 이 얘기는 덧붙여야겠다왜 이런 연구를 해야 할까하는 것이다나도 박사학위를 정말 즉각적인 소용이 닿지 않는 연구를 통해서 받았다지금은 그렇지 않지만그렇다고 당장의 소용 닿는 연구만 하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군지 메구 박사는 이렇게 얘기한다기린이나 소나 양과 같은 동물을 표본을 만드는그것도 많이 만드는 데 ‘3()’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무목적무제한무계획’. 그냥 한다는 것이다지금 필요 없다 하더라도 100, 200년 후에는 필요할지도 모르니까(그때 필요하지 않더라도 상관 없다한다는 것이다쓸모없는 일로 여겨지는 연구를정말 열심히 열정을 가지고 자부심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이유다이런 사람이 과학을 해야 한다이 책을 덮으며 더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이런 과학을 충분히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답답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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