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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은 파티드레스》로 알게된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 《가벼운 마음》을 읽었다. 먼저 파티드레스를 읽고 이 책을 만나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로 먼저 보게 되었다.
📖🍋 내 생애 초기의 삶, 나의 방랑자 생활은 내게 세상에 대한 볼거리를 끝없이 제공했다. 집시와 서커스 공연단이 거쳐 가는 마을들은 사로 닮았다. 교외에 있으면서 다소 헐벗은 진흙투성이의 땅이다. 아름다운 동네에는 어릿광대를 위한 자리가 없다. 117
++ 주인공 뤼시는 천연덕스러운 순수함을 가진 사람이다. 어린시절 서커스단에 속해 일하는 부모님을 따라 정착이 아닌 이동하는 삶을 살았고 한때는 어느 창고에서 '의자 두개, 식탁 하나, 라디오, 침대, 초'를 비롯한 안락함을 위한 모든 걸(!) 갖고 살기도 한다.
그녀는 그녀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존재, 늑대의 죽음이후 가출을 일삼기도 하며 새로 알게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바꿔 알려준다. '속임수를 대하는 순수한 취향과 반복하는 말이나 반짝이는 돌들에 즐거워하는 마음으로.'(57)
안정감이라고는 없어보이는 묘지앞에 정원을 두고 사는, 암울할 것처럼 보이는 그의 삶이지만 11살때 모차르트(줄리앙)와 랭보(모모)를 만나 우정을 싹틔우고 '자신에게 가혹해야 하고 스스로를 내몰아야 한다는 그들의 말'을 몸을 웅크리고, 음표와 대기의 품 안에서 하염없이 잠들어 있는 뚱보(바흐)를 자신의 삶의 해방으로 삼으며 자유스럽게, 허무맹랑하게 살아간다. 무려 17살에 매우 정형화된 모범적인 법조인의 가정의 공부잘하는 아들을 남자로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를 잠시 스쳐지나가는 연인으로 여기는 남자의 부모를 뒤로한채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물고기의 수조를 돌로 쳐 작은 물바다를 만들어 낸 남자(로망_다 읽고나니 이름이 재밌다. 갖기전에는 간절하지만 갖고 나서는 이내 시들한 느낌을 잘 맞춘듯)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결혼을 한다.
📖💛 수 세기를 이어온 진지함과 세련된 취향에 대홍수를 일으킨 사람과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96
📖🍋 살면서 우리가 서로에게 할 말이 무엇이 있을까? (...) 말들은 변하고, 목소리는 남는다. 101
📖🍋 예술가의 조력자 노릇은 꽤나 그럴듯해 보이고, 이런 이미지의 내가 퍽 마음에 든다.
++ 괴짜같은 뤼시는 결혼전 부모에게 법조인말고 글쓰는 예술인으로 살겠다고 포고한 그의 남편 로망의 뒷바라지로 향수가게에서 일하며 새 애인, 단풍나무를 마음에 품는다.
가을옷을 입고 진홍색 불로 타오르는 그 단풍나무를 보고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라고 하는 그녀는 얼토당토한 방법으로 사랑에 빠진다. 이번에는 동물이나 음악이나 나무가 아닌 진짜 사람과! 그 사람은 일명 괴물.
📖🍋 로망, 나는 나를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고 말하지. 그러나 내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건 갓 불에 덴 상처야. 그 상처로 나는 피어나고 시들어 가. 나는 괴물을 사랑해. 그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어도 나는 그의 품 안에서 황홀한 자유로움, 황홀한 열망을 느껴. 131
📖💛 나는 괴물에게서 나중에 더 완벽히 연주하기 위해 연주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더 이상 사랑받지 않아도 되도록, 그리고 종국에는 갑절을 넘어선 그 너머 다른 곳, 감정과는 다른, 필시 사랑이 분명한 무언가를 향해 갈 수 있도록 사랑받는 법을 배운다.
++ 파리 오페라 수석 첼리스트 '알방(괴물)'은 큰 아파트에서 바흐 음악을 줄곧 들으며 첼로없이 연주하는 연습을 한다. 그녀는 매일밤 저녁에 그를 찾아 사랑을 나눈다.
그녀와 이별한 후 '자기 자신으로 꽉 차 있(던,134) 시시한 연애편지같은 글에서 벗어나 자신을 애도하는 글을 쓰면서 출판을 하게 된다.
후반부에서 뤼시는 요양병원에 있는 할머니를 자주 찾아가다가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는 간호사 말을 듣고 할머니를 퇴원시켜 함께 여행을 나선다. 결말부분은 정말 완벽하고 이상적이었다.
보뱅의 글을 처음 접한 나는, 특히 꾸민 듯한 문장보다 직관적인 문체, 현실묘사를 잘하는 문장을 좋아하는 나로썬 초반에서 유려한 문장과 툭툭 끊어지는 느낌의 문장에 이 책을 잘 읽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청년까지의 삶을 따라 가다보니 주인공의 매력에, 보뱅의 아름다운 문장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일상이 무료하고 현실도피하고 있을때 보뱅의 작품도 찾아보고 싶다.
📖🍋 만일 내가 남자였다면(...) 무정한 여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지 자문해 본다. (...) 무정? 아니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가벼움. 그게 더 낫다. 나는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직 완전히 그렇지는 않지만 그 마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내 마음은 티타티티라티다.144
++ 책을 다 읽고 책날개를 펴보니, 저자 보뱅은 프랑스의 대표 시인이자 에세이스트로 동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맑은 문체로 사랑받는 작가라고 한다.
📖💛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사랑, 우리를 충분히 안다고 믿는 사랑에서 벗어나야만 성장할 수 있다. 177
++ '사랑'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프랑수아즈 사강말고 이젠 크리스티앙 보뱅이 될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랑말고도 가족에 대한, 결혼 생활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데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