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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건 볼품없지만 ㅣ 트리플 3
배기정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4월
평점 :
젊은 작가가 쓴 소설을 내가 읽고 좋아한 적이 있을까 잠시 생각해 봤다. 이렇다할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없는 것 같다. 시나 소설 등 문학 작품을 쓰는 사람을 동경했지만 딱히 시를 좋아한다고,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해당작품을 많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거침없는, 특유의 말투와 표현이 살아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와 여유가 될 때 하나씩 탐독해 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남은 건 볼품 없지만》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어디선가 보았고 마침 서평단 모집글로 떴길래 바로 신청해서 받아보게 되었다. 책은 내 손바닥 크기로 작고 하드커버라 핸드백 속에 쏙 넣고 틈틈히 읽어도 좋을만했다.
이 책의 저자는 배기정 작가이다. 한예종에서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글의 소재와 글 속의 장면묘사를 보면서 한편의 단편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책엔 총 네개의 단편 소설, 《남은 건 볼품없지만》,《끝나가는 시절》,《레일라》와 뮤지션 오지은의 발문이 실려있다.
섞정, 몸을 섞다 생긴 정의 줄임말이었다. 후재는 그 두 음절의 단어로 저와 내 사이를 정의 내렸다. -9쪽
++ 글의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영화제작 팀의 서른셋 친구 후재와 섞정은 영화 뒤풀이 날 만취했던 새벽 이후 3년간 몸을 섞은 사이다. 하지만 사귀는 사이는 아니다.
어느 날, 신대방동 어느 모텔에 정과 닮은 사람의 그림이 있다고 보러가자 꼬시는 후재와 찾아간 곳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을 맞닥뜨리게 된다.
감독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스물네 살의 어리고 경력 없는 여자애쯤은 홀랑 넘어오게 하고도 남을 현학적인 눈빛이었다. 그 눈빛은 나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결정적으로 내가 혹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나이와 직업 때문이었다. 예술 하는 아저씨(45세, 남). (...) 나는 그 감독 밑에서 8개월 정도 버티다가 나보다 더 어리고, 귀엽고, 예술하는 아저씨를 좋아하는 다른 작가에게 밀렸다. 그 후 스물다섯이 되던 해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32~33쪽
++ 주인공 정은 스물네 살때 사십대의 영화감독아래서 작가로 8개월간 일하다가 이듬해에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다. 그는 '자하'라는 시골스러운 동네에서 마트 캐셔로 일하며 어학원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허름한 곳에서 영어를 배우고 찰스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와 동거를 하게 되고 어느 날은 남자가 말도 없이 떠난다. 그리고 갑작스레 지진이 나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집에서 여권과 현금을 챙겨 비상구 근처까지 갔을때 그 앞에서 프랭키라는 예쁜 이목구비를 가진 애로배우를 만나게 되고 함께 며칠을 지내게 된다.
사실 소설의 이야기는 흥미로웠지만 무슨 이야기를 작가가 하고 싶었는지 그 답을 낼 수가 없었는데 책의 말미에 있는 오지은의 발문을 보니 이해가 좀 되었다.
나는 안다. 예술남들이 섞정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이 잘 통하고 자기 예술을 이해해주고 가끔 도움도 받고 어쩌면 잠도 잘 수 있는 그런 섞정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짧은 기간'의 섞정이만을 좋아하는지. 아이구 섞정이 쯧쯧, 하고 넘어가고 싶지 않다. 사람들은 이 판에 들어오고 재능을 보여주고 운이 좋으면 기회를 얻고 크레딧을 쌓아 성장하고 더 큰일을 얻는다. 그렇게 자리를 잡는다. 운과 재능과 버티기가 동반되어야 하는 간단치 않은 과정이다. (...) 그 똑똑한 여자 선배들은 다 어디로 갔지? 이상하다 생각이 들었을 때 이미 나는 판에서 쫒겨난 섞정이다. 새로운 섞정이들이 빛나고 있다. -195쪽
《끝나가는 시절》과 《레일라》 모두 매력적인 글이다. 특히, 오빠의 여자친구인 레일라 집에 오빠와 같이 얻혀사는 주인공 그녀는 오빠가 그 집에서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발각되어 쫒겨난 후에도 꿋꿋히 집주인 레일라와 함께 지낸다. 평범한 직장여성으로 그려지지만 현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의 삼십대 직장 여성을 잘 그려냈다. 직장에서 누구나 불편해하는 프로 불편러와도 적당히 잘 지낼 줄 알고 철없는 오빠를 그런대로 받아들이고 오빠의 전여친이라는 이상한 관계 속에서도 그녀에 대해 캐묻고 알려고 하지않는 사람이다. 남자친구와도 그럭 저럭 지내지만 결국 마지막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조적인 레일라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신비적인 느낌 또한 이야기를 풍부하게 한다.
나의 감성과 해석의 깊이로는 저자의 소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책을 덮으며 이 시대의 한 면을 또 엿보는 즐거움을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 본 서평은 서평단활동의 일환으로 출판사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