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무 생각없이 보고 웃을 수 있는 매체를 찾을 때가 더러 있다. 개그프로그램을 즐겨보진 않지만 가볍게 예능프로를 보며 히죽히죽 웃으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싶을 때. 아니면 책을 선택하더라도 무겁고 딱딱한 책 말고 문장을 읽다가 '풉!'하고 웃을 수 있는 정도의 책을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요즘 내가 그랬다. 매일 반복되는 삶 같지만 왜이리 여유가 없는지..... 지난 목요일부터 금, 토, 일 무려 4일간의 황금휴가였지만 더 피곤하고 더 지치고 뭔가를 해야겠는데 자꾸 몸은 좀 쉬라고,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깐이라도 쉬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런 가운데 펼친 책
「이런 경험 나만 해봤니?」란 제목의 책.
위에서 말한대로 편안하게 넓직한 쿠션에 기대읽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었다.
이 책을 쓴 저자분은 몇 달 전 '기억을 파는 향기 가게'로 만난 신은영작가님이시다. 내 대학 절친과 동명이인이라 만남이 더욱 특별했던.... 블로그이웃이기도 해서 새로운 소식이 있을때마다 보곤 했는데 이 분 내가 알던 때만해도 3번째 작품을 내신거였는데 1년도 채 안지난 사이 작품을 줄줄이 내시고 지금은 8권의 책을 내신 분이 되었다.
일년에 한 권 내기도 어려운데 그 분은 어떻게 5권의 책을 줄줄이 내실 수 있었을까.

공감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이 분. 마음속 묵혀둔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 햇볕을 쬐어주는 일. 표현이 참 시적이다. 이 분 내면에는 묵혀둔 이야기가 엄청 많은가보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생을 참 지루하게 사는구나.'
한때는 호기심 대장처럼 궁금하게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지나치게 평범한 일상 속에 갇혀 살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끄적끄적 과거 경험들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어느 것은 너무 선명해서 마치 어제 일처럼 세세하게
생각났고, 어느 것은 띄엄 띄엄 기억이 조각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억을 길어 올리는 일은 내 삶에서
지루함을 멀리 던져버렸다.
「이런 경험 나만 해봤니」 작가의 말 중에서
저자는 위의 연유로 과거의 경험들을 상기시켜 글로 적어내기 시작했다.

위의 문장들이 나의 '그 옛날, 열정으로 충만했던 때. 반짝였던 때' 떠올려 보게 한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으면 낙심하고 우울할지만 알았는데 저자의 말대고 과거의 재밌는 추억을 떠올리며 열정을 되살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책의 목차는 간단하다.
이야기들이 길지않고 짧아서 다른 일을 하다가 중간 중간 머리식힐 때 읽어도 좋을 듯 하다.
★ 녀석과의 악연 ★
하루는 하숙집으로 들어서는데 주방 앞에 까만 실루엣이 보였다.
'하숙집에 토끼를 키웠었나?'
그렇게 무심히 생각하며 통통한 토끼에게 다가갔다.
"으악!"
기다란 귀 대신 기다란 꼬리를 확인한 순간, 나는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살면서 그렇게 큰 녀석은 처음이었다.
(중략)
어느 날, 외출했다가 저녁쯤에 하숙집으로 들어섰다. 구조상 부엌이 입구라서 매번 초긴장 상태를 경험해야 했다. 그날도 나는 부엌에 들어서기 전, 단단히 심호흡을 했다.
'하나, 둘, 셋!'
후다닥, 발을 옮기는 순간,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물컹!'
(중략)
메이드들이 나와 녀석을 번갈아 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아닌가!
(중략)
"너 발로 쥐를 밟았다며?"
++ 첫 이야기부터 강렬했다. 나도 쥐와의 추억(?)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중학교때 교실에 어른 주먹만한 쥐가 나타났는데 다들 겁에 질려했을때 미소년처럼 생긴 씩씩한 친구가 쓰레받이와 빗자루를 들고 겁없이 달려들었다. 어찌됐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쥐의 모습이 너무도 강렬해서 잊혀지지가 않는다.
★ 아이가 사라졌다★
"내 공룡 어디 갔어?"
장난감 주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일제히 아이들이 몰려와 벤치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좀 전까지 우리 아이가 앉아 있었는데..."
까무잡잡한 아이의 엄마가 그럴리 없다는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애가 범인이야!"
아이들이 작은 머리통을 모아 수사망을 좁혀갔다.
(중략)
메이드가 사라졌다!
메마른 얼굴이 신호였던 모양이었다. 도망치겠다는 신호! 현실의 지긋지긋함으로부터 당당히 탈출하겠다는 신호!
주인아주머니의 난감한 얼굴을 보며 나는 왠지 모를 통쾌함을 느꼈다. 갑과 을의 대결에서 을이 보기 좋게 이긴 현장을 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중략)
"엄마! 내 옷이랑 신발이 몽땅 사라졌어!"
주인 딸이 소리쳤다.
++ 놀이터에서 또래들과 있다가 공룡장난감을 훔친 아이를 보며, 필리핀 유학시절, 하숙집의 똑똑한 메이드를 연상시킨 저자의 글에 몰입되었다.

위의 문장으로 맺는 이야기.(p51)
저자의 이야기는 마치 옆집언니로부터 듣는 것 같이 이야기가 귀에 척척 달라붙는 느낌이다. 배경과 상황, 인물에 대한 묘사가 참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저자의 다양한 경험을 엿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특히, 한 이야기에도 두 가지 에피소드를 섞어 장면을 오가며 묘사하는 이야기방식도 독특했고 흥미로웠다.
재밌고 특별한 에피소드들이 있어도 이렇게 맛깔나게 옮기긴 쉽지 않을텐데, 동화작가로서의 이력이 있는 그녀라 가능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그가 왔다 ★
"김영삼은 김현철 데리고 물러나라!"
커다란 구호가 또 시작되었다. 나는 앵무새가 되어, 얼굴도 모르는 김현철씨에게 물러나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장례 3일째 날, 그 날은 바람도 거세지 않았다. 마지막 날이라 멀리서 찾아온 손님들만 드물게 있었고, 우리는 '노동'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끝나간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중략)
우리는 자동인형처럼 고개 숙여 인사했다. 무리 중 대장처럼 보이는 사람이 앞장섰다. 그에게는 진한 스킨 냄새가 났다. 공손히 절을 한 다음, 늘어선 우리에게 그가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누구인지를 살폈다.
(중략)
그는 김현철씨였다! 깜짝 놀라 내 눈이 큼지막해졌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천천히 천막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에 우리의 시선이 박혀버렸다.
'김현철씨가 우리 엄마를 어떻게 알지?'
++ 어머니 장례식에, 한 때 물러나라고 했던 (전)김영삼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가 오신 일. 알고보니 정계진출을 위한 홍보활동을 위해 대통령의 고향인 거제에 온 것이고, 당시 저자의 아버지가 거제 작은마을의 이장으로 계셔서 인사차 오셨던 것. 정말 그 순간 놀랐을 작가님의 모습이 상상이 된다. 삶에서 때론 우연처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이것도 사는 묘미가 아닐까.
책 내용 모두 재밌었지만 그 중 인상깊었던 이야기를 더 꼽는다면, "신문도둑을 찾아라"와 "진상고객들","외모에관하여", "문양", "불과 몇 분 전, 불과 몇 시간 전","큰 엄마의 비밀","어느 속물의 고백"이다.
특히 "문양"은 부인을 먼저 여의고 재혼한 아버지의 새부인 '일명 마귀할멈'이 자신의 결혼식에 기어코 참여한 이야기를 쓴 글인데 자신의 부모님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와의 애증관계를 위트있게 표현한 부분이 인상적이였다.
이 책을 보고 문득 다시 일기를 써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하루 하루 흘러가는 일상중에 기억하고 싶은 에피소드를 한 장의 사진과 함께 남겨놓고, 일상이 무료하고 지쳐갈때쯤 다시 펼쳐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