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5-16
꽝 닫힌 채 열리지 않는 문 앞을 서성이는 아버지
엄격한 어머니께 끝내 전하지 못한, 늦은 고민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부모 혹은 자식을 향한 원망과 그리움
조금씩 다른 모습이지만 우리는 모두 이 서글픔을 어디선가 이미 맡아 보았고 그 언젠가 만져보게 될 것이다. 오랜 시간 지워지지 않는 짙은 부채감으로 우리를 따라 올 것이다. (중략) 그 감정들은 이전보다 더 세심한 배려가 되어 관계를 굳게 만들어주기도 할 테지만, 도리어 관계를 무겁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자연스러운 일에도 옅은 긴장과 의무감을 느끼게 하면서 말이다.
P22
자신의 개성이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닉네임에도 자신은 없고 자식이 있다. 궁금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 누군가의 말처럼 부모가 된다는 건 자신의 이름을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오래 머물렀던 적이 있다.
P29
내게 당신은 커다란 나무 같다. 늘 그 자리에 머물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다. 끝없이 뻗어가다가도 별안간 작게 웅크리는. 욕심일지 몰라도 나는 나의 나무, 당신이 언제까지나 내 곁에 커다란 품으로 머물러 주기를 바란다. 힘이 들때면 그 커다란 그늘에 숨고 이따금 배가 고플 땐 까치발을 들고서 당신의 열매에 닿고 싶다.
P69
내게는 너무도 익숙했던 아버지라는 그 품이 당신에게는 희미해져버렸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나는 그 품을, 그 이름을, 아버지 당신이 다시 한번 불러볼 수 있기를 바랐다.
P99
우리는 언제쯤 당신을 기다리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랜 시간 자식의 등만 바라보고 있는 당신에게 밝은 미소로 달려가는 용기를 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P102
할아버지를 간호하던 병실에서 우리가 단둘이 남았을 때, 조용히 건네던 당신의 한마다.
"아들 내가 나중에 늙어도 지금처럼만 해줄래?"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당연하지."라고 얼른 대답하고 말았지만, 그 한마디가 잊히지 않는다.
P104
나에게는 거대한 산 같던 당신이 당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며 조용히 눈물 흘릴 때 나는 알았다. 거대한 산도 울음을 머금고 있다는 것을.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사랑하는 딸을 떠나보내고 아버지를 떠나보낸 당신의 삶이 얼마나 많은 울음을 삼키고 있을까 생각한다. 단단해 보이던 당신의 등이 처음으로 흐느낄 때, 나는 아버지라는 슬픔을 목도했다.
P109
소아마비로 걸음마저 불편한 아버지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셨습니다. 독한 진통제 같은 소주 한 잔에 땀방울을 안주 삼아 훔쳐내며 한평생 건축 현장 막일로 자식을 키워내고 가정을 지켜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는 힘 없는 여든의 백발노인이 되어 호통 한번, 된 술 한 잔 드시질 못합니다.
장애를 가진 아버지는 장녀인 제가 건장한 청년을 만나 평범하게 살아가길 바라셨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보다 더 심한 장애를 가진 남편을 만났습니다. 장애를 가진 아버지께서 더 잘 이해하시지 않겠냐며 허락을 구했을 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장애를 가지고 한 세상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내 자식마저 고생하며 사는 건 못 보겠다며, 처음으로 자식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가슴이 찢기는 아픔이 그제야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P123
내가 사랑하는 남자, 나는 당신의 우는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울음을 참는 법을 배울 것이다. 영원히 당신을 닮은 얼굴로 살아갈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은 당신의 존재 아래에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게 세상 어느 것보다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