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지겨움
장수연 지음 / Lik-it(라이킷)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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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동그란 원안에 해드폰을 쓰고 무언가를 듣고 있는 이 책의 표지가 참 앙증맞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다름아닌 10년차의 MBC라디오 PD.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다양한 삶을 이야기하는 라디오피디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고, 그 직업의 반짝임 속에 어떤 면이 숨어있을까 궁금해서 선택한 이 책. 사실 가볍게 읽을 책일거라 생각하고 펼쳤지만 생각보다 글에 깊이가 느껴졌고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도 안겨주는 책이었다. 특히, 경험들 속에 녹아있는 글들에 저마다 울림이 있었고 오랜 시간동안 라디오 방송을 만드는 일을 하며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진솔한 책이라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11시반에 출근하는 워킹맘이라 오전에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2시간정도의 여유시간이 생긴다. 그 시간동안 보통 간단히 집안을 정리하고 책을 읽거나 서평을 쓴다. 그 시간이 나에겐 참 소중하고 활력이 되는 시간이다. 그런데 요즘엔 코로나바이러스때문에 출근전까지 아이들과 함께 있어서 그 시간을 내 시간으로 활용하지 못한지 꽤 오래되었다. 궁여지책으로 아이들이 잠깐 한눈판 사이 책을 몇 장 읽거나 그것으로도 욕구가 해소가 되지 않으면 밤까지 잘 참았다가 아이들을 재우고 작은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는다. 이 책도 그렇게 읽은 책인데, 왠지 늦은 밤 심야 라디오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밤시간에 듣는 음악이나 라디오를 좋아해서 그런지 이 책도 야심한 밤에 참 읽기가 좋았다.

 

이 책은 총 4가지 챕터로 되어있다.

 

 

Chapter 1.

낭만적 입사와 그 후의 일상

 

챕터1은 라디오감성에 대해 저자가 느낀 것을 쓴 글이다. 아래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가지고 왔다.

 

결혼한 부부가 연애 시절의 설렘을 추억하며 살아가듯이, 회사 생활을 할 때도 힘들 때 꺼내 볼 '옛날 사진'이 몇 장 있으면 좀 낫다. 소설 한 편에 얽힌 이 일련의 사건들은 라디오 피디라는 내 직업과의 로맨스다.P18

 

김연수 소설가가 쓴 <<소설가의 일>>에 그녀에 대한 일화가 쓰여있단다. 난생 처음 독자들과 대화하는 행사를 했는데 질의응답시간에 어떤 사람이 손을 들고 라디오 피디가 꿈인데 나중에 부탁하면 자기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겠냐고 물어서 그러겠다고 대답했는데 정말 연락이 왔다는 이야기다. 거의 첫 부분의 이 일화를 보고 저자의 이야기에 더욱 흥미가 일었다.

네 삶에 라디오가 켜져 있다면, 일상이 조금 더 즐거워 질 거야. 주변의 작은 것들을 더 알아보게 될 거야. '노래 한 곡을 듣는 완벽한 방법'같은 삶의 잔기술들, 유용한 건지 무용한건지 도대체 헷갈리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거야. 오늘 내가 만든 2시간의 방송으로 이렇게 문장을 맺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P21

 

짝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처럼, 머릿속 고민처럼, 책 속 문장처럼,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의 제목을 적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래듯 누군가는 라디오가 주는 뭉근한 따뜻함에 기대 인생의 터널을 지난다. 세상에는 이런 매체도 필요할 것이다.P34

 

'뭉근한 따뜻함'이란 단어가 참 라디오와 잘 어울린다. 단어 어감도 좋아 속으로 몇 번씩 되뇌어 봤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가장 힘든점이 '방송을 매일 해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 가장 위로가 되는 부분도 그 지점이다. 수많은 하루 중에 이런 날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게 뭐든 받아들이기가 덜 심란하다. 매일 하는데 어떻게 매일 좋겠나?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이상할 때도, 고약할 때도 있는 게 자연스럽지. 매일 잘할 수 없기 때문에, 매일 기회가 있다는 게 다행스럽다 .P38

 

나는 서사를 만들어가기에 더없이 좋은 매체가 라디오 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만남, 우정의 구축, 인연으로 이어지는 신비, 생방송의 해프닝, 이 모든 일상의 반복 그리고 시간의 축적, 첫 방송에서 바들바들 떨던 디제이가, 고정게스트와의 첫 만남에서 다소 어색하던 분위기가 시간이 지나며 어떻게 변해가는지 청취자들은 실시간으로 지켜본다. 그 과정에서 프로그램에는 에피소드가 쌓이고 디제이에게는 캐릭터가 부여되며, 팬들에게는 이야깃거리가 생긴다. 서사다. 각본없는 서사.P43

 

 

난 당신의 삶 한 귀퉁이 한 조각 이자

그대의 감정들의 벗 때로는 familia

때로는 잠시 쉬어가고플 때

함께임에도 외로움에 파묻혀질 때

추억에 취해서 누군가를 다시 게워낼 때

그때야 비로소 난 당신의 음악이 됐네

그래 난 누군가에겐 봄 누군가에게는 겨울

누군가에게는 끝 누군가에게는 처음

난 누군가에겐 행복 누군가에겐 넋

누군가에겐 자장가이자 때때로는 소음

이소라의 <<신청곡>> 인용

 

 

저자는 위의 곡을 라디오에 대해 정확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한 귀퉁이 조각이자 그대 감정의 벗, 누군가에겐 자장가 때로는 소음' 저자의 글이 좋은 이유가 참 적절하게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다른 책의 좋은 글들을 곁들여 자신만의 색깔로 글에 생각을 담아내서이다.

 

 

 

 

 

 

Chapter 2.

프로듀서의 일

 

 

P93

위의 사진 속 글은 저자의 매니저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며 '인격을 드러내는 관계'를 말한다. 저자의 실제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라 더욱 글에 힘이 느껴졌다.

 

 

 

P98

위의 사진 속 문장들은 저자가 <이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을 때 7분짜리 인물다큐를 위해 70대 어르신(새들에게 새 집을 지어주는 할아버지)를 인터뷰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70대 남성이라는 정보만으로 말귀 못 알아듣고 방송이 뭔지도 모르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말한게 편접됐다고 노여워하는 고집불통 할아버지의 이미지를 떠올린 것) '개인을 보는 연습'이란 제목에 걸맞게 본인의 개인의 편견에 대해 쓴 글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나의 가해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며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참 멋진 분이란 생각이 든다.

 

 

 

P101

 

 정유정 작가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피디라는 직업을 갖고 싶었던 것일까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방송국 직원인가 피디인가.

 

 

저자는 정유정 소설가의 인터뷰를 상기하며 자신이 피디라는 직업을 갖고 싶었던 것인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던 것인지 생각해보는데 그녀의 글쓰기 방식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이야기를 자신에게 빗대어 생각해보고 자신의 고민의 답을 찾는 그녀의 넉넉함이 좋았다.

 

좋은 피디가 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재능은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 인지도 모른다. (중략) 그렇다면 '욕구 관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찾은 방법은 스스로를 '피디'라고 생각하지 말고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략) 프로그램이 먼저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먼저여야 계속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 같다.P102

 

유쾌하고 감동적인 라디오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지는 못하고 거기 출연한 연예인을 섭외하기에만 급급했다는 생각에 자괴감과 질투로 속이 시끄러운 날, 나는 그 프로그램들의 첫 방송을 본다. (중략) 저 프로그램은 어떻게 시작했는지, 출발할 때의 방향이나 콘셉트가 유지된 부분은 어디고 달라진 부분은 어디인지, 달라졌다면 언제 어떤 계기인지, 이런걸 찾아보는 일이 재미와 위로, 그리고 배움을 준다.P114

 

피디들끼리 '스튜디오의 오류 '라고 부르는 현상이 있다. 스튜디오 안에서 출연자들과 녹음할 때 듣는 느낌과, 녹음이 끝난 뒤 편집실에서 혼자 헤드폰을 끼고 듣는 느낌, 그리고 실제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 듣는 느낌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녹음할 땐 박장대소했던 부분이 라디오로 들으면 썰렁할 때도 있고, 편집하면서 이건 아닌데 싶어 거슬렸던 부분이 전혀 문제로 느껴지지 않고 지나갈 때도 있다. 이런 오류를 최소화하려면 프로그램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P121

 

챕터2는 궁금했던 라디오 프로듀서로서의 일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파트였다. 항상 창의적인 것을 요구하는 피디일. 스트레스도 많고 공영방송에 대한 조심스러움과 부담감으로 정말 힘들 것 같다.

 

 

Chapter 3.

오늘도 출근

 

 

 

태풍처럼, 해일처럼, 폭우처럼, 폭설처럼, 생각할 수 있는 그 모든 무지막지한 것들처럼 쏟아져내리는

시간들을 지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오전에는 딴짓을 하자고 다짐한다.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끄적이자고. 내 일과 조금도 관련 없는 무용하고도 아름다운 문장들이 오늘의 나를 구원해주길.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을 인용하며 '제약을 가해오는 회사에 대한 은밀한 복수로서 책 읽기와 글쓰기가 반드시 필요하다'(P151)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나도 끄덕끄덕 해본다. 언젠가부터 시작된 나의 책 읽기와 글쓰기 이젠 나에게 뗄레야 뗄 수 없는 나의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남편때문에, 혹은 자식때문에 속시끄러울 때마다 난 책 읽기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글쓰기로 마음을 정돈했다.

 

'나이든 사람들은 체력이 달려서인지 일에 의욕이 없어 보여. 시간만 떼우다 퇴근하려는 것 같아'라는 편견이 불쾌하고

모욕적이라면 '요즘 젊은 것들은 편한 것만 찾지 열정이 없어.'라는 생각 역시 그렇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나는 언젠가부터 위와 같은 생각을 윗세대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세대 간 격차에서 오는 생각의 다름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기게됐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세대가 나이든 세대를 설득해서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지란, 우리 사회처럼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분위기, 강력한 존댓말 문화와 장유유서의 가치관이 오래도록 지배해온 공기 속에선 매우, 매우 어렵다는 게 내 경험이다. 기성세대를 설득하는 방법으로 편집실을 늘리고 52시간 근무제를 정착시키는 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다. 생각을 바꾸는 것, 마음을 달리 먹게 만드는 것이 설득으로 쉬이 되는 일이던가. 그래서 나는 만약 변화가 필요하다면, 결정권을 가진 기성세대에게 변화의 필요성을 설득하는게 아니라 변화의 동력에 있는 젊은 세대에게 결정권을 주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P158

 

채용과 업무 배치, 보상 체계 등 인사 시스템 전반에 걸쳐 시대 변화를 반영한 새로운 설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그건 노동자에게 불리한 방향이기때문에 노조는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아마 실현되기 어려울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불리한 방향'이라는 말의 속내가 의심스럽다. 성벽 안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일하지 않아도 보수를 지급받고, 진짜 일할 사람은 계약직으로 젊은 인력을 채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지금이 정말 괜찮은가?P169

 

선배에게 말할 때는 최대한 직설적으로 분명하게, 과한 겸양이나 쓸데없는 웃음을 제거하고. 후배에게 말할 때는 '만약 선배라도 이 말을 했을까? 한 번 더 생각한 후에 말 꺼내기. 최대한 선배를 대할 때와 후배를 대할 때의 차이가 크지 않도록, 예의를 갖춰 담백하게.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연차가 아니라 내가 하는 업무만으로 평가받겠다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도록 노력할 것 .P176

 

챕터3에서는 기성세대와 차세대에 대한 생각을 담담한 어조로, 냉철하게 다루고 있다. 공영방송국도 관료제적인 면모가 다분히 보이고 비탄력적인 모습들도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위에서 정리한 문장 중 특히 마지막 문단의 글은 기억해두었다가 사회생활하면서 선배와 후배를 대할 때 위의 기본자세를 잘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Chapter 4.

퇴근하겠습니다

 

인과관계가 자주 어긋나는 인생의 면모에 대해 생각한다.

인생은 이유가 분명치 않은 일투성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결과로 암이 찾아온 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내 삶의 방식의 원인이 암인 것이다.

나에게도 다른 사람이게도 더 너그러워지겠다고 다짐한다.

너의 지금은 네 과거의 결과라고 말하는 대신,

현재가 원인이 되어 너의 미래가 달라지길 바란다

말하겠다고 마음먹는다.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에서

 

사실 난 마지막 챕터부터 먼저 읽었다. 아무래도 나도 일하는 워킹맘이다보니(짧은 시간동안 일하지만) 일하는 엄마로서의 삶이 제일 궁금했나보다. 챕터4에서 가장 와닿았던 부분을 위에 옮겼다. 이 책에서 제일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기도 하다. "너의 지금은 네 과거의 결과라고 말하는 대신, 현재가 원인이 되어 너의 미래가 달라지길 바란다" 나에게 해주는 위로 같은 문장이다. 이 책 속의 문장들이 나중에는 내 기억속에 희미해져도 위의 문장 하나라도 남아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 쉼없이 달려오다가 '갑상선암'에 걸려 겨우(?) 휴식을 취하고 다시금 일의 전선으로 들어간 그녀. 지금도 방송을 위해 고민하고. 아이와 함께 짬내서 시간을 보내느라 고군분투할 그녀를 마구마구 응원해 드리고 싶다.

 

책을 덮으며, 책 표지가 책 내용에 비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책 표지가 귀엽긴 하지만 고급스러운 그녀의 글을 조금 더 빛나게 하는 디자인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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