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만 괜찮습니다 - 섬에서 보내는 시 편지
시린 지음 / 대숲바람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 '일상은 여행처럼, 여행은 일상처럼'이라는 슬로건에 부합하는 양 자신의 주거지를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주변에서 '제주도 한달 살이'를 하는 사람도 있고 그를 주제로 한 책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제주에서의 일상'을 사진과 시로 담은 책이 있다고 해서 궁금했다. 책의 제목은 괜찮지만 괜찮습니다이다. 제목을 보니 괜찮다는 건지 괜찮지 않다는 것인지, 별로 괜찮지 않은 것 같지만 이만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단 얘긴지 궁금해진다.

 

섬에 간다는 건 여행을 떠난다는 말이다.

좀더 멀리 가기 위해 바다를 건너고

낯선 곳의 시간을 걷는 것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꿈을 꿀 때

그 섬은 온전히 당신만의 것이다.

 

책의 겉표지의 문구이다. 이 책의 부제는 '섬에서 보내는 시 편지'이다.

 

제주에 오십 년 산 이가 제주에 오년 산 이에게 부끄러워집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풍경이지만 사실은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데 저도 놀라서 담구멍에라도 숨고 싶습니다. 길과 바다, 돌과 억새의 숨결을 읽어내는 작가의 시력과 청력에 경외감을 느낍니다. 일상을 쓰다듬으며, 숨 한 번 들이마시며, 최선을 다해 버티어 냈음에 눈앞이 흐릿해집니다.-강은미 시인

책을 찬찬히 살펴봤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의 겉표지와 제주 토박이인 한 시인의 추천글이 쓰인 뒷표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책을 펼치기 전이지만 이 책에는 제주의 사람많은 주요 관광지를 배경으로 하지 않고 작가의 발이 닿는 곳, 시선이 닿는 곳을 따라 찍고, 쓴 글이란 느낌을 받았다.

사진은 내게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깊게 눈을 맞추게 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합니다. 그렇게 내 삶을 조금씩 바꾸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죽어 있던 내 맘에 조금씩 생기를 보태어 줍니다. 나는 사진을 찍습니다.P19

 

 

 

 

 

작가는 '사진을 왜 찍는 걸까?'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위와같은 답을 내놓는다. 예전에 일을 하면서 청소년들과 사진 작가와 연결하여 주고 '사진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학교부적응 청소년이라는 특별한 타이틀이 없었다면 그 작가분과의 연이 닿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대단한 실력과 평판을 지닌 그 분을 섭외를 했다는 것이 참 의아하고 놀라웠다. 그 분은 아이들과 수업을 하며 사진을 찍는 기술을 가르치시는 대신 자신의 마음을 사진을 통해 들여다보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그 때의 작업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걸 보니 아이들의 반응과 참여도, 내면의 변화 등, 정말 좋았던 이유가 많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사진을 찍는 요령도 느낌도 잘 모르지만 사진을 찍는 것도 좋아하고 보는 것도 좋아한다. 그래서 '시린'이란 신비로운 필명을 쓰는 저자가 궁금했다.

 

 

 

차례를 보면 '어느 해 어느 월' 부터 시작해서 '3, 4, 5....1, 2, 다시 어느 월'로 끝난다.

 

 

 

괜찮다. 슬프면 목놓아 울어도 되고

다시 웃어도 된다.

살아있는 게 죄스럽다는 슬픈 말은

없어야 한다.

 

왠지 아래의 서문에 쓰인 아래의 사진의 이미지와 위의 문구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름드리 나무가 펼쳐진 작고 소박한 길을 보고 있노라니 긍정적인 느낌이 풍겨나오는데 말이다.

 

 

 

 

 

사진이 없었더라면

내가 밟은 세상의 넓이를 어찌 알았을까

사십이 년 십 개월간 눌리어온

딱딱하게 쪼그라든 내 껍대기 주름이 만든 길을

등허리에 패인 땀얼룩 살비듬의 지도를

버리지 못한 그러나 결국 자기에게 보여야만 할 뒷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차마 웃을 수 있었을까

네가 없었더라면

-「괜찮지만 괜찮습니다'사진에 부침'

 

사진과 함께 실린 저자의 시에 사진을 대하는 태도가 잘 담겨 있는 듯하다.

스무 살에 처음 찾아왔던 제주는 이 세상 같지 않은 고요함과 아늑함이 있었따. 나도 모르게 가던 길을 멈추고 말했다. 나중에 나이를 좀 더 먹으면 이곳에서 살아야겠어. 그 순간, 겹쳐 지나가던 무수한 차원 중의 어느 한 차원에서, 시간이 정지했다. 그리고 그 순간의 모든 정보가 내 몸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졌을 것이다. 그때 맡았던 공기의 냄새, 길가에 있던 동백나무 잎의 빛깔, 멀리 보이는 바다의 색과 파도에 부서지던 햇빛, 바람인 듯 파도인 듯 들려오던 소리, 피부에 닿던 햇볕의 온도와 바람의 감촉, 그 모든 것들을 지금도 뚜렷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 후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는 세월이 가고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커졌다. 삶의 골목을 해매거나 잠시 주저앉아 있을 때면 더 끈덕지게 나를 불렀다. 결국 나는 기대도 그리움도 아닌, 가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제주에 왔다.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P26

 

저자는 자신에게 계속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자연스레, 하지만 절박하게 제주에 왔다.

 

 

 

 

3

계절은 기억처럼 문득 돌아온다. 봄이 오는 길목에 내린 눈처럼, 지난 겨울 떨군 꽃을 기어이 또 피워내는 동백처럼

 

 

제주 어디서나 동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동백마을'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다고 한다. 남원읍 신흥2리에 제주도기념물 27호인 동백나무군락지가 있다고 하니 그곳인가 보다. 나는 2011년도 쯤 여수에 가서 동백꽃을 처음 보았다. 그 때 다홍빛 동백꽃이 너무나 탐스럽고 예뻐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떠올라 동백꽃과 관련된새, 동박새에 대한 옛 이야기가 더욱 반가웠다.

 

 

 

4

그래서 풀꽃들은 여린 비람에도 후드득 후드득 몸을 떨며 눕는가 보다.

오래전 그날들에 피어 있던 바로 그 꽃이어서.

 

 

 

사월에는 모든

사월병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꽃이 꽃다웁지 않고

햇살 해맑게도 검은자위를 할퀴는 거

한 가닥의 바람이 뼛날을 벼리는 밤도

돌아버린 계절에 묻은

오지 않은 오월 때문이라고

아무도 가 없는 까닭은

모두가 가 된 까닭이라고 말입니다.

-「괜찮지만 괜찮습니다P73

 

 

 

10

나무는 무엇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있다. 그냥 서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든든하다며 마음을 기댄다.

 

 

 

 

사진을 찍다가, 글을 쓰다가, 책을 읽다가 갑자기 멍해지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순간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급기야 이제는 아무 때고 '여긴어디 나는누구'씨가 찾아옵니다. 오늘도 도서관에 숨은 저를 불쑥 찾아온 '여긴어디 나는누구'씨에게 쫒겨 나왔습니다. 비가 오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그랬습니다. 툭하면 몇 시간이고 차를 달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가곤 했지요. 버스 기차 배 비행기 가리지 않고 잡아타고 멀리 가려 했습니다. 어디야? 정동진이야. 목포야. 토함산이야. 울릉도야. 오름이야. 섬이야. 미쳤어? 그러니까 너무 오래 미쳐 있지 않았던 겁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 쪽에서 '여긴어디 나는누구'씨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차의 방향을 돌렸습니다. (중략) 오후 여섯시부터였으니 달린 시간이 여덟 시간인가요?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던 애월, 힘들게 찾아갔던 월령리, 이유 없이 고향 같은 모슬포, 커피향 닮은 햇빛의 사계, 꿈을 주었던 칠십리, 뭔지 모를 그리움의 보목, 가도가도 끝이 없는 성산을 지나왔습니다. 늘 한 발 앞에 있는 '여긴어디 나는누구'씨를 따라가며 길에 떨어져 있던 기억들을 주웠습니다. 미쳤었던, 잘 미치던 마음을 찾고 있습니다. 미쳐야 할 때는 미쳐야 합니다. 무언가에 미쳐 있을 때, 그 기운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힘입니다. 괜찮지만 괜찮습니다.P177-179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무언가에 미쳐 있을 때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작년엔 난 책읽기와 서평쓰기에 미쳐 살았다. 그러지 않으면 왠지 시간을 그냥 허비하며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해 산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 것만 같았다. 1365일 내내 미치면 안되겠지만 분기별로 한 번씩은 미쳐봐도 좋지 않을까?

문득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싶어진다. (중략) 조금 올라왔을 뿐인데 주위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바로 옆의 산방산과 사계리 앞바다에 뜬 형제섬, 이웃한 송악산, 단산을 둘러 싼 밭은 한라산 아랫자락부터 바다까지 이어진다. 이런 풍경을 보면 왜인지는 모르지만 마음이 푸근해진다. 낯선 마을인데도 어릴 적 살던 곳인 향수가 느껴진다. 어디선가 밥 짓는 연기라도 올라온다면 더욱 그럴 테지.P187

 

 

 

 

 

11

가을바람이 우리 마음에 사무치는 건 억새를 지나온 바람에 묻어 있는 그리움 때문이었나 보다.

  

 

 

 

 

우울할 때면 하루키를 읽었습니다. '하루키를 읽으면 살맛이 난다.' 그 당시 일기에 썼던 말입니다. 대단히 감명 깊었다는 게 아닙니다. (중략) 제가 하루키의 글에서 본 건 그런게 아니라 '그래, 그런 거지 뭐'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일생일대의 사건, 인생의 깨달음, 놀라운 진리, 사고의 대반전... 세상은 그런 거대한 것들로만 지탱되는 게 아닙니다. 시시콜콜한 일상, 하나마나한 이야기,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들 같은 작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는 세상을 보았습니다 .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변변찮은 일상을 묵묵히 살아가는 이야기, 무심히 던지는 농담 정도라는 겁니다. 지루해하기도 하고 가끔은 어이없어 하다가 피식 웃어 버리며 그래, 사는 게 뭐 대순가... 그러다 보면 조금은 기운이 나기도 해서, 실없는 농담을 따라해 보기도 했던 거지요. P198

 

 

 

 

 

12

 

가장 평범한 풍경이 가장 평화로운 풍경이며, 우리는 여기에서 위로를 받는다.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은 갑자기 다가오기에 충격이다. 예상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기에 비현실적이다. 이때 우주로 날아가 버린 정신을 돌아오게 하는 건 너무 평범해서 평소엔 눈에 띄지도 않던 풍경들이다. 세상이 무너졌는데 주위 풍경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퍼뜩 정신이 드는 거다.P217-218

요즘 우리 나라와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우한 폐렴 바이러스)로 시끄럽고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옮을까봐 불안해한다. 어제 지인들과 카톡으로 이야기하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대화에 속한 4명 중 2명은 어린이집에도 계속 아이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나다니는 사람, 어느 누구에게 바이러스가 있어서 그것이 나에게 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불안하다고..... 나는 이야기를 보다가 이 또한 지나갈거라고, 너무 불안해하지 말자며 위의 형광색으로 표시한 책의 문장을 보내주었다. 이번 사태가 '예상할 수도 없었던 사건, 갑자기 다가오기에 충격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불안해하고 걱정만하며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사태 가운데서도 우린 소소하게 시간을 보내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너무 상황과 현실에 휘둘리지 말고 지금의 이 소중한 일상을 잘 살아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한 번 더 말합니다. 똑같은 사진은 없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찍으면 되지 뭐, 라는 생각이야말로 대단한 오해란 겁니다. 나중은 없습니다. 지금이 지나간 후에 다시 찍을 수 있는 사진이란 없습니다. 모든 경험과 삶이 그렇듯.P234-235

 

저자는 위의 이유로 열심히 사진을 찍나보다. 나도 아이들과 있을 땐 사진을 많이 찍는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행복하고 찬란한 순간을 담기 위해서 말이다.

괜찮지만 괜찮습니다.이 책은 책꽃지에 꽂아두고 잠시 쉬고 싶을 때,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한번씩 꺼내볼 만한 책이다. 책 중간중간 저자가 직접 찍은 따뜻한 감성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만 제주의 조용한 그 장소에 머물러 시간을 붙잡아 놓고 여유를 즐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제주여행을 계획한다면 저자의 카메라 셔터가 눌러진 대로 그 곳을 바람따라 햇볕따라 거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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