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단어만 봐도 단전에서 쓰리고 아프다.
고통_통증_증오. 이상하게 나는 이렇게 끝말잇기가 되어 버린다. 고통.
그 아픈 것을 구경하는 사회라니. 타이틀이 잔인하다. 그 고통 속에 속수무책이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보고만 있는 사람들인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인가? 여유 없어 여력 없음인가? 나만 잘 살면 되는 타자를 향한 냉랭함인가? 바쁘고 빨리 돌아가는 사회에서 내 것 하나도 챙기기 힘든 귀찮음인가? 남의 고통을 즐기는 사디즘인가? 행복도 불행도 비교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경쟁 사회 속 순위 다툼인가? 남의 불행으로 나의 안위에 대한 안심과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이기적 시선인가. 그러고 보니, 남에게 시선을 둔다는 것. 관심을 둔다는 것조차 안 하는 해 개인의 시대에서 고통이든 잔치든 행복이든 구경이라도 해 줘서 남들 삶을 볼 수 있는 건가. 나는 당최 타인의 삶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이런 책 제목을 보면. 굳이 왜. 고통을 구경하는가.
관찰자의 시점과 방관자의 시점이 다른가. 적절한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이 사회 안전망과 사회 복지 측면인가. 별의별 생각이 든다.
정작 가족의 고통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소홀하게 되는 나로서는 반성이 되고 나의 무심함에 경각심을 일으키는 제목이다. 관조가 또 하나의 폭력이겠다.
무뎌진 나의 통점이 요사이 삐질 살아나 활개를 치고 있는데 통증을 느끼는 내가 나를 무시하고 참고 견뎌내면 사그라들까. 아니다. 더 축적되어 한꺼번에 통증이 엄습한다. 내 통증 먼저 알아주고 다독여줘야 남의 아픔, 고통, 통증도 들여다볼 수 있다. 상처 입은 치유자처럼.
아. 그렇다고 통증이 있는 사람이 고통을 안다고 다 고통을 분담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개인적 고통, 사회적으로 야기된 고통. 관계에서의 고통.
어머. 삶이 고통이다.
고통의 끝을 향해 같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끼리 모른 채 하지 말고 구경만 하지 말고 고통을 분담하면 사회가 바뀌지 않을까. 나의 고통이 너의 고통이 될 수 있고.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되는 건 세상 이치.
고통 앞에 평등한 인간들이 모여사는 세상. 구경만 하지 말고 서로의 고통에 대해 들어주고 개선할 사항이 있으면 개선하고, 나눠주고, 해야 인간 세상이겠지.
기쁨은 나누면 두 배,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
하긴. 요즘엔 하도 각박해서 슬픔을 잘못 나누면 괜히 자신의 결점과 슬픔이 약점으로 책잡혀 구렁텅이에 빠뜨린다는 사기꾼들도 있다고 하니 험한 세상 조심하시길.
고통 호소도 안 하고 외롭게 죽어가는 이들이 더 양지로 나와 호소하길.
고통 호소하면 들어주고 같이 해결책, 대책 상의해 보기.
아프다고 떼쓴다고 다 허용되고 수용되는 정치 싸움 말고 나의 이익 추구한다고 남의 권리 이익 뺏는 이상한 그룹에서는 나오길.
예전에 기아 어린이 돕기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참 나는 불편했다. 그 뼈 밖에 안 남은 온몸에 파리가 눌러 붙은 상황에서 말끄만 자원봉사자가 사진만 찰깍 찍으며 환한 웃음을 짓는 걸 보고 저 사람은 뭐지? 아픔과 고통에 공감이 안 되는 언행에 쇼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던. 고통을 감히 안다고 가식 떠는 것도, 티 내면서 도움 주는 것도 싫다.
이제 나의 책 제목에 대한 잡담은 여기서 자르고, 슬슬 책을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