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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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첫인상 : 고통에 ×자를 자꾸 걷어 내고 싶은 욕구가 일어서 자꾸 표지에 새겨진 고통 글자를 손가락으로 휙. 쒹. 매만졌다.

고통 단어만 봐도 단전에서 쓰리고 아프다.

고통_통증_증오. 이상하게 나는 이렇게 끝말잇기가 되어 버린다. 고통.

그 아픈 것을 구경하는 사회라니. 타이틀이 잔인하다. 그 고통 속에 속수무책이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보고만 있는 사람들인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인가? 여유 없어 여력 없음인가? 나만 잘 살면 되는 타자를 향한 냉랭함인가? 바쁘고 빨리 돌아가는 사회에서 내 것 하나도 챙기기 힘든 귀찮음인가? 남의 고통을 즐기는 사디즘인가? 행복도 불행도 비교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경쟁 사회 속 순위 다툼인가? 남의 불행으로 나의 안위에 대한 안심과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이기적 시선인가. 그러고 보니, 남에게 시선을 둔다는 것. 관심을 둔다는 것조차 안 하는 해 개인의 시대에서 고통이든 잔치든 행복이든 구경이라도 해 줘서 남들 삶을 볼 수 있는 건가. 나는 당최 타인의 삶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이런 책 제목을 보면. 굳이 왜. 고통을 구경하는가.

관찰자의 시점과 방관자의 시점이 다른가. 적절한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이 사회 안전망과 사회 복지 측면인가. 별의별 생각이 든다.

정작 가족의 고통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소홀하게 되는 나로서는 반성이 되고 나의 무심함에 경각심을 일으키는 제목이다. 관조가 또 하나의 폭력이겠다.

무뎌진 나의 통점이 요사이 삐질 살아나 활개를 치고 있는데 통증을 느끼는 내가 나를 무시하고 참고 견뎌내면 사그라들까. 아니다. 더 축적되어 한꺼번에 통증이 엄습한다. 내 통증 먼저 알아주고 다독여줘야 남의 아픔, 고통, 통증도 들여다볼 수 있다. 상처 입은 치유자처럼.

아. 그렇다고 통증이 있는 사람이 고통을 안다고 다 고통을 분담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개인적 고통, 사회적으로 야기된 고통. 관계에서의 고통.

어머. 삶이 고통이다.

고통의 끝을 향해 같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끼리 모른 채 하지 말고 구경만 하지 말고 고통을 분담하면 사회가 바뀌지 않을까. 나의 고통이 너의 고통이 될 수 있고.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되는 건 세상 이치.

고통 앞에 평등한 인간들이 모여사는 세상. 구경만 하지 말고 서로의 고통에 대해 들어주고 개선할 사항이 있으면 개선하고, 나눠주고, 해야 인간 세상이겠지.

기쁨은 나누면 두 배,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

하긴. 요즘엔 하도 각박해서 슬픔을 잘못 나누면 괜히 자신의 결점과 슬픔이 약점으로 책잡혀 구렁텅이에 빠뜨린다는 사기꾼들도 있다고 하니 험한 세상 조심하시길.

고통 호소도 안 하고 외롭게 죽어가는 이들이 더 양지로 나와 호소하길.

고통 호소하면 들어주고 같이 해결책, 대책 상의해 보기.

아프다고 떼쓴다고 다 허용되고 수용되는 정치 싸움 말고 나의 이익 추구한다고 남의 권리 이익 뺏는 이상한 그룹에서는 나오길.

예전에 기아 어린이 돕기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참 나는 불편했다. 그 뼈 밖에 안 남은 온몸에 파리가 눌러 붙은 상황에서 말끄만 자원봉사자가 사진만 찰깍 찍으며 환한 웃음을 짓는 걸 보고 저 사람은 뭐지? 아픔과 고통에 공감이 안 되는 언행에 쇼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던. 고통을 감히 안다고 가식 떠는 것도, 티 내면서 도움 주는 것도 싫다.

이제 나의 책 제목에 대한 잡담은 여기서 자르고, 슬슬 책을 읽어보자.

차례

고통을 전시하고 소비하는 대중, 그리고 그것을 보고서 공감한다는 착각. 나와 연결되지 않은 고통과 아픔, 고통의 서사를 가감 없이 내보내기.


인상 깊은 내용 스크랩

타인의 고통을 본 뒤 슬픔에만 머무르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하다.

참사의 책임을 묻기 위해 정치가 가동되는 순간을 원천 봉쇄하는 커다란 부작용을 낳고 있지는 않을까?

국가 애도 기간이라니. 이 시기에 풍경이 공공기관 풍경이 떠오른다. 슬픔을 강요하는 국가. 애도 이외에 다른 소리는 내지 못 하도록 입막음 기간이지 않았나..

타인의 고통을 보고 난 뒤 충격을 개인의 '도덕적 무능'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도 없다. 때론 죄책감이라는 통증을 넘어서야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길이 열린다.


고통은 콘텐츠가 됐다.



고통을 외면하지 하는 법.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전달되지 못하는 진실 혹은 전달해야 전해지는 남의 사정

누군가의 애도가 우리의 애도가 되고 결국 우리를 바꿔놓을 수 있도록!!

책을 읽고 나서

우리는 수많은 미디어나 매체를 통해 고통의 현장을 목격한다. 그런데 그것이 구경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혹은 저렇게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으니 상대적인 행복감을 가질 수 있다는 시각. 그것이 무섭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질 수 있고 더 자극적인 고통에 대중이 몰린다고 하니 끔찍했다. 수해를 입어 수해 현장에 간 대통령이 반지하 침수 현장을 직접 보며 한 말이 생각난다. 물을 퍼 올려서? 물이 불어나기 전에 빨리 탈출하지 못했냐고. 그런 장면을 여과 없이 방송에서 보여주는 게 참 신기했다. 망자의 혼이 경기를 일으킬 만한 일이다. 그런 보도 자료를 내보내는 청와대도 신기했다. 약자의 고난은 구경거리로 보이고 재난 현장은 정치적 포토월로 전락하는 것도 모자라 사자에 대한 나무람인가?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멘션에 가슴이 철렁했다.

기후 위기에 대한 뉴스가 별로 보도되지 않고 직접적인 지역에 살지 않는 사람은 먼 세상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방글라데시는 기후 위기의 최전선에 있는 나라라고 한다. 기후 위기로 홍수가 나 방글라데시아의 어린아이가 죽고 캘리포니아 산불이 촉발한 기후 위기 뉴스는 운이 좋은 편으로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방글라데시는 아시아의 빈곤한 국가 중 하나이고 개발을 위해 앞장서서 탄소를 배출한 나라가 아니다. ​​

우리가 보이는 고통을 수집하는 사이에

보여줄 수 없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이 몇 개인지를 헤아려본다.

101쪽

광주 출신의 보도 기자였고 현재는 미국에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서, 고통의 현장을 취재하고 담아내야 하는 그 직업의 특성에서 나오는 자기 성찰적 메시지가 이런 책을 쓰게 한 것 같다. 타인의 고통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시의적절하게 대중들에게 전달되어야만 하는 기사를 쓰는 기자의 고뇌,혹은 많은 자기 물음, 회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도를 함으로써 고통에 대한 알림과 개선과 방향 틀음, 메시지 전달에 대한 정당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는 평소 기자라는 직업군에 대해 약간의 선입견이 있었는데 기자들의 편협한 시각? 혹은 윤리, 도덕이 없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이고 소비 지향적인 보도에 질렸던 적이 있다. 기자들이 다 같은 기자가 아니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디어 기사의 클릭 횟수는 광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읽히지 않는 기사는 폐기되는 것을 감안해볼 때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소셜에 올라오는 기사들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저급한 가십에 불과한 것들이 쏟아지는 현실이라 과연 기자들은 어떤 직업 윤리 의식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소위 특종이라고 하는 것들도 남의 은밀한 곳을 파헤치는 것들이 많고 사회 정의나 사회 문제를 심도 있게 싣는 기사가 드문 탓이기도 하다. 특히 나에 관련된 직업군에 대한 기사는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아 도대체 누가 취재를 하기에 저렇게 왜곡되고 사실이 아닌 것만 쓰여지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기사로 인해 반대편은 사회적 죽음 및 매장을 당할 수도 있고 오해를 사기도 한다. 기자들의 펜대가 아주 양날의 검처럼 작용할 때가 많으니 정확하고 사실만 담은 기사를 써 주면 좋겠다. 언론이 가진 힘이 엄청 크고 언론을 움직이는 것은 기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기자라는 직업군이 정말 윤리의식과 객관성, 공정성, 양심이 필요한 직업군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통을 소비하도록 돕는 기자가 될 것인지, 고통을 알리고 개선시키는 촉매제로 역할을 다할 것인지는 기자의 최초 시선이 중요함을 느낀다. 요즘은 기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여전히 미디어에 노출되는 기사는 기자들의 몫이다.

나는 다른 한편으론 기자들의ㅈ그 기사에 노출되기 위해 여전히 안간 힘을 쓰고 억지 행사, 과대포장, 과소 연민 동정 연출, 이슈화하려는 미디어 인정 중독자들에게는 여전히 불편하다. 기사의 주인공이 되려고 미디어에 한번이라도 노출되기 위해 불필요한 일, 가식적인 일을 진행하고 접할 때마다 그런 기사의 내용이나 논지가 그대로 읽혀질까 두렵고 아에 전부 조작이지 않을까?라는 합리적인 의심도 해본다. 더 자극적이고 더 불쾌하고 더 잔인하고 더 고통스러운 것을 찾는 대중에게 받치는 일종의 떡밥 기사는 항상 불편하다.

고통의 현상에 대해서는 사실 그대로 알리지만, 되도록 사건의 본질과 멀어진 자극적인 사진은 같이 보도되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것이 사실이나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범죄자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인권차원에서 반대하는 것이 아닌, 대중들이 왜 신상을 공개하게끔 형량이 솜방망이로 나오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대중들은 그렇게 신상 공개해서 분노와 공분만 살 뿐 실질적인 대안이 되지 않는다. 분노하게끔 한 범죄자들의 잔인성 앞에 법은 적절한 형량을 내리고 두 번의 단죄가 내려지지 않는 것이 맞는 방향같다. 그 범죄자의 얼굴을 기억했다가 그 범죄자를 피하거나 예방한다? 그건 도대체 누구의 발상인가? 신상 공개에 대한 갑논을박 토론보다 또 그들의 인권을 떠나 법 앞에 제대로 된 심판이, 또한 흉악 범죄자들이 적절히 사회적으로 격리되기를 바란다.

5.18, 제주 수학여행, 10.29. 샌프란시스코 마약 취재, 등등의 일련의 사건이 이 책에 나오는데 다시 한번 그때의 일이 상기되었고 그 때의 보도들이 생각났다.

속수무책의 무력감, 우울감, 죄책감.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슬픔을 나누고 그 때의 일을 진상 규명하고 책임자 처벌을 마땅히 하는 것이 또 다른 고통을 발생시키지 않는 방법이라 말한다. 다른 이의 슬픔에 공감하고 연대하고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에 동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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