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미국의 많은 청둥들이 보여준 겸손하고 감사하는 자세에 여러 번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자신들이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을 순순히 인정하기에 좋은 공연을 보여주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클래식 음악가든,가수든, 연극배우든, 서커스 공연가든 그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얼마나 잘하나 보자‘하는 청중이 많은 한국과 가장 다른 곳이기도...

자기 나라 음악을 연주해 주는 걸 좋아하는 건 러시아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차이콥스키나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등을 연주하면 러시아 관객들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대륙적 기질 때문인지 러시아인들은 유독 스케일 큰 음악과 연주, 그리고 꽁꽁 언 날씨를 녹여줄 불같은 음악을 높이 산다.

음악에 삶을 파괴당한 비운의 천재. 인생의 질곡을 초월해 영원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과도 같은 그의 음악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수십년을 지나 지금의 나에게는 그의 음악이 삶의 원동력으로 돌아왔다. 오늘도, 내일도, 다시 일어설 힘이 없을 때는 나도 모르게 그의 연주를 튼다. 나와 내 음악을 살리는 그가 나에겐 영겁의 고통을 감내하고 인간에게 불을 구해다 준 프로메테우스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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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선생님을 매료시키는 것은 ‘재미‘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음악회장에서 꼭 어떤 숭고한 감동을 받아야만 가치 있다 생각하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감탄스러운 ㄱㅣ교에 언굴을 찡그릴 사람은 한명도 없어. 그 재미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감동이 아니고 뭐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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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나쁜 사랑일지라도 예술만은 그것을 껴안는다.

아 템포 a tempo. 이탈리아어로 ‘원래 박자‘를 의미하는 이 말은 악보에서 원래 박자로 ‘되돌아오라‘는 의미로 쓰인다. 통상적으로 작곡가들은 리타르단도 ritardando(점차 느리게)를 적고 난 몇마디 후 이것을 적어 늦추어진 박자를 원상태로 되돌린다.

날쌘 음표들이 똑똑한 화성들과 함께 유머러스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하이든의 곡임을 짐작하고, 비슷하긴 한데 훨씬 더 성악적인 멜로디에 극적인 분위기를 가졌으면 그건 모차르트임을, 거기에 반음계적 선율과 화성이 더해지고 가벼움이 더해지면 멘델스존임을 구분해 낼 수 있다면 이미 그들 고유의 언어와 어법을 파악한 것이나 다름없다.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이 영원히 깨지 않을 꿈속에 박제된 최후의 낭만이라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그냥 그 순간의 참혹한 현장들이었다. 어차피 진실이 실종되어버린 사회에서 그에게 유일한 진실이란 죽지 않고 사는것, 그리고 그 삶 너머의 음악뿐이 아니었을까.

전통과 혁신을 오가는 잽싼 마인드, 장조와 단조를 마구 넘나드는 과감한 화성 전개, 악기의 색깔에 무게를 많이 두고 음고 하나하나의 가치를 높이 살린 특색 등은 같은 유대계의 피를 가지고 있었던 선배 멘델스존의 음악과도 닮았다. 특히 그 모든 것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쓴듯한 매끄러운 텍스처가 제일 닮았다. 하지만 고유의 악마적인 시상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멘델스존보다도 더 뛰어나다. 강한 내러티브를 배경으로 하는 리스트의 ‘이유있는‘ 광기에 비교하자면 알캉의 광기는 영 앞뒤가 없어 훨씬 더 공포스러우면서도, 뭔지 모른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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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된 연주`란 무엇일까?
선생님은 관객이 집에돌아가서까지 또렷이 기억해 모든 사람과공감하고 싶은, 그러나 누구에게도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말로는 설명할길이 없는 단한번의 `매지컬 모먼트`가 있었다면 그 음악회는 성공한거라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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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류근의 축시,를 읽다가 펑펑 울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래, 지나간 일들이 어느 계절에 떨어진 낙엽,
같이 아무 것도 아닌
고요하게 지난간 일들일 수 있도록...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내게는 아주 소중했었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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