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조각 부서지는 눈을 보다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김경주 지음 / 열림원 / 2015년 1월

시극이라.. 익숙치 않은 장르였지만 다양한 실험을 해오고 있는 시인 겸 극작가 김경주의 작품인만큼 기대가 컸다. 처음 책을 받아보았을 때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의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읽었을 때보다는 당혹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의 물결처럼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책이 술술 읽히는 느낌을 받았다.

김 씨는 얼마 남지 않은 다리에 고무를 끼운채 거리를 기어다니며 사람들에게 동전을 받는다.

늙은 파출소 직원은 그런 김 씨를 업어주고 달래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며 그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인물. 김 씨 대신 김 씨의 아내와 사람들을 향해 화를 내기도 하는 인정있는 인물로 보이나.. 책을 읽으면서 깨닫는 점은 그 역시 가까스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죽은 사람과 닿아 있다는 점에서 그 역시 죽음을 사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 씨는 바쁘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손등이 밟히면, 하늘을 올려다보곤 한다.

자신의 불쾌한 몸을 들어 올려다본 하늘.

지느러미 같은 고무를 달고 바다를 헤엄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죽음에 다다르고 싶다는 생각외에도 자유로이 세상을 누비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것 같다.

쏟아지는 눈 속에 몸을 풀어보고 싶다는 욕망도 그러한 것이 아닐지.

파출소 직원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 뻔한 자식을 찾으려 하지 않았으며, 그로인해 아내를 잃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순경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곧 자리를 떠나야 하며 길을 자주 헤매곤 하는 사람. 가족을 찾으러 오는 사람들을 보며, 누구도 찾지 않는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며 항상 그는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파출소 직원은 자신이 기억을 잃는 것이 두렵다고 하지만, 정작 기억은 파출소 직원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로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닐 것 같다. 어느 새 자신을 책망하는 그를 위로하는 김 씨.

동병상련이라는 슬프고 기쁜 마음의 공유로, 서로에 대한 불신이나 자신을 향한 모멸감이 눈녹듯 녹아가는 경험을 한다.

이때 눈 속에 풀어지는 것은 독자의 눈(目)이기도 할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시극으로 읽힐때 작가의 의도는 성공한 것이 되리라.

존재의 비루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기묘한 공존

빛의 제국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빛의 제국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는 소설가와 화가, 사상가, 혁명가의 작품 및 사상,
이념이 등장하여 작품의 설득력과 리얼리티를 높인다.
그중에서도 소설 제목이기도 한, 결말 부분에서 언급한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은 '기묘한 공존'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내용과 상응한다.

캄캄하지만 휘황찬란한 도시

화려하고 아름다운 줄 알았던 세상은 냉혹했으며 잔인했다.
그런데도 필사적으로 삶을 살다보면 행복과 기쁨을 경험할 때가 있었다.
그것은 일찌감치 생을 마감했다면 맛볼 수 없었을 기쁨이다.

몰락의 제국

젊은 여자와 중년 여자의 대립이 강렬했다.
'부주의한 아줌마'와 '프라다를 입은 애교있는 젊은 여자'의 대치상황을 통해
늙어간다는 것,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횡포를 느낀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제국

마리에게 일어나려 했던 교통사고에서 마리는 '죽을 뻔 했던' 피해자이며,
싼타페 주인은 '죽일 뻔 했던' 가해자였으나,
경찰은 마리를 가해자로 심판, '정의'하려 했다.
(마리는 싼타페에게 드잡이한 가해자이기도 했다)
마리의 딸 현미는 아영 같은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법이 있어야 한다며
친구 아영을 변호하지만, '사회적 약자'인 아영을 다시한번 피해자로 만든다.

아군이냐 적군이냐 그것은 문제도 아니로다

동지(동무)와 멱살을 잡고 다투는가 하면, 친구였던 자를 총으로 쏴죽이는,
간첩에 의한 간첩을 위한 간첩의 살인사건이 발생하는가 하면,
경찰은 경찰을 막고, 붙잡혔던 경찰은 경찰을 죽일 기세로 걷어차버린다.
간첩은 경찰에게 간첩을 밀고한다.
속고 속이는 '악몽 같은 날'
그러나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데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빛.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사랑과 파국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줄 수 없었던 성욱의 사랑법,
사랑을 지키고 싶었던 마리의 사랑법,
그들의 사랑은 '호텔 보헤미안'에서 막을 내려야 했다.
그것은 기영-마리-현미 가족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욕망

현미는 정국의 철이를 죽이고 정국을 홀로 독점하고 싶은 욕망, 사랑에 빠진다.
현미는 정국의 철이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는커녕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법이 현미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선택의 길에서 헛살지 않았음을 외치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라는 말처럼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어려운 선택을 하고 때로는 어처구니 없고 비난받을 만한 선택을 하면서,
그러한 결정이 최선이었으며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믿고 싶은 간절한 마음.
위태롭지만 아름다운 등불같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