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는 왕 project B
라울 니에토 구리디 지음, 릴리아 옮김 / 반달(킨더랜드)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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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세상의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주위에 산적한 문제들, 관계의 피로, 돌파구가 없어 보이는 현실을 피해 그저 돌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때.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과 괴로움으로부터 도망치고만 싶을 때. 그저 돌이 되어 아무런 생각도 움직임도 없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때.


그러나 돌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그리 오래 끌어안고 지낼 순 없다. 돌 또한 바람과 비, 햇빛과 중력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돌마저도 결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님을 알고 있으니까. 그리하여 다시 돌이 될 수 없는 나 자신으로 되돌아가 현실 앞에 마주서야 한다. 돌이 아닌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수 없는 나를 되새기며. 끊임없이 누구와 무엇과 어디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하며. 그리하여 숨을 다하는 날까지 무수한 상황과 감정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를 안아주며. 





🔖 “아무것도 아닌 왕은 아무것도 아닌 왕이 아닐지 몰라.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어.”


여기, 아무것도 없는 왕국을 다스리는 왕 ‘미모 1세’가 있다. 자신이 거느리는 세상의 모든 것이 그저 터무니없는 ‘상상’ 일뿐인 아무것도 없는 나라. 그곳에서 미모 1세는 자신만의 완벽하고 이상적인 삶을 살아간다. 아무것도 없는 곳의 왕이 되어 만들어 낸 ‘점선’의 세계는 자신의 위대함을 알리기에 더없이 완벽한 곳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무(無)의 왕국’에 떨어진, 선명하고 뚜렷한 선을 갖춘 빨간 ‘무엇’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없기에 그 어떤 요동도 혼란도 불안도 없는 완벽한 왕국이었다. 그렇기에 미모 1세에게 ‘무엇’은 왕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반드시 없애야 하는 무엇이었다. 그러나 만약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자신의 꿈 속에서만, 허황된 상상 만이 가득한 또 다른 ‘아무것도 없는 세계’ 속에서만 ‘무엇’의 실재를 마음껏 사라지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왕국에서 ‘무엇’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는 이는 당연하게도 미모 1세밖에 없었기에,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는 ‘무엇’의 행방과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는 이 또한 오로지 미모 1세뿐이었다.


그렇다면 더는 아무것도 없는 왕국이 아니게 된 곳에서, 미모 1세는 사라지지 않는 ‘무엇’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만 할까. ‘무엇’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미모 1세의 세상에 수많은 ’무언가’들을 퍼트리게 될까. 곧 점선이 아닌 ‘실선’의 존재들로 가득 차게 될 ‘유(有)의 왕국’에서, 미모 1세는 ‘무언가’들과 함께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자신을 제외한 아무것도 없는 세계를 다스리며 (그러나 사실은 그 세계 안에 갇혀) 살아간 미모 1세. 아무것도 없는 세상의 위대한 통치자로 살길 바랐던 그의 마음이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읽혔던 아무것도 없는 왕. 소리 내어 따라 읽을 수밖에 없는 문장과 군더더기 없이 종이 위에 담긴 그림은 실선의 실재를 외면한 망각 속에서, 현실이 될 수 없는 상상으로만 점철된 환각 속에서 그 누구도 살아갈 수 없음을 말하고 그려내고 있다.


빨간무엇들이 면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심을수록 퍼져나가고 퍼져 나갈수록 커져가는 힘을 품고 있는 씨앗으로 비유된무엇’. 그래, 씨앗은 사이에도 심길 있고, 싹을 틔울 있고, 꽃을 피울 있지. 정말이지 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수가 없지. 누구도 돌이 없다는 사실은, 아니  누구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없다는 사실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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