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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 아니라 감이라고요!
이진희 지음 / 키큰도토리(어진교육) / 2024년 10월
평점 :
<간이 아니라 감이라고요!>(이진희 글 그림/키큰도토리/2024)는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 이야기의 어린이용 공포물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아니면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 이야기에서 따 온 말장난이나 좀 거창해 보이지만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 이야기의 재해석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작가의 전작이자 첫 작품인 벼룻물에서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십장생도에 녹여 넣었는데 다음 작품도 구미호가 떠오르는 이야기인 것을 보면 우리의 것에 애정이 많은 작가인 것 같다.
오래된 책은 시기에 맞지 않는 점들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전래동화도 서양의 옛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딸아이가 어릴 때 나는 전래동화의 상당부분을 읽어주지 않았고 전집에 포함된 서양의 설화나 옛이야기도 슬쩍 빼냈다. 그러다 북스타트 자원활동가 양성과정 수업을 들으면서 강사분께서도 ‘아이에게 전래동화를 읽어주시나요?’
라는
질문을
하시며
전래동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이 분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셨다는 말을 듣고 내가 유난스러운 건 아닌가 보다 싶어 조금 안도했었다. 강사분도 아이들에게 전래동화를 읽어주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다 미취학 아동에게는 읽어주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고 하셨다.
전래 동화에 대한 이런 우려를 가진 입장에서
<간이
아니라
감이라고요!>와 같은 작품은 아주 반가운 책이다. 아이에게 전래 동화를 읽어 주지 않은 것이 전래 동화의 시대 착오적인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뿐 우리 것에 대한 불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소품에 신경을 많이 쓴 것으로 보인다. 건조함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쌓아 놓은 장작이나 처마에 매달아 놓은 씨옥수수, 지게와 솥뚜껑, 새댁이 이웃과 음식을 나눌 때 사용하는 함지박과 소쿠리도 요즘 아이들은 민속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미리 엄마가 널고 있는 이불, 장독대와 그 옆에 널어 놓은 시래기, 빨래터의 풍경, 상투와 망건도 그렇다. 닭장과 도롱이는 박물관에서도 흔치 않은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어른인 나는 여기서 소소한 재미를 느끼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와 함께 책을 보며 이런 물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의 잔인함을 말장난을 이용한 유머로 덮은 점은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간’을 먹는 줄 알았던 새댁이 알고 보니 ‘감’을 먹은 것이라고 오해를 풀어주더니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한번 반전을 보여 준다. 나는 새댁이 자신을 아끼는 마을 사람들의 사랑에 마음이 움직여 조용히 마을을 떠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닭 같은 작은 동물을 잡아먹다가 점점 돼지나 소같이 큰 동물을 먹게 되고 결국 사람을 해치게 된다는 것이 구미호 이야기의 기본 설정이지만 이 책은 이런 클리셰를 가볍게 무시한다.
마을 사람들이 새댁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혼인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고, 아마도 이 마을에 나타난 지도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새댁은 온 동네에 칭찬이 자자하다.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음식 솜씨까지 훌륭한데 이웃과 나눌 줄도 안다. 그런 새댁을 좀 질투하는 마음이 있던 미리 엄마는 밤에 새댁에 뭔가를 먹는 것을 발견하고 다음날부터 새댁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퍼지는데 그 다음 전개되는 이야기는 좀 의외였다. 전래 동화의 클리셰에 따르면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더 커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없는 말을 덧붙이지도, 섣불리 마녀사냥을 하지도 않았다. 마을의 어른이자 지식인으로 생각되는 훈장님을 찾아가 의논을 하고 사실 확인부터 하려고 한다. 새댁이 먹은 것이 ‘간’이 아니라 ‘감’이라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아주 기뻐한다. 내심 새댁에 대한 소문이 사실로 밝혀질까 걱정을 한 것 같다. 새댁도 아마 이 마을에 계속 살면서 선배 구미호의 전철을 밟을 계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사랑에 조용히 마을을 떠나는 것으로 보답을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간이 아니라 감이라고요!>는 누구나 알 만한 구미호 이야기를 너무나 유쾌하게 풀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영국 속담에 신사는 우산과 유머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전설의 고향’의 주역을 꼽자면 빠지지 않을 구미호를 소재로 이런 유머를 발휘할 수 있는 이진희 작가의 다음 작품이 아주 기대된다. 요즘 아이들에게도 옛날 사람이라 놀림당하는 어른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