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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평점 :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경제서적입니다.경제학이라니 벌써부터 왠지 대학교 전공서적같고, 이해하기 힘들 것 같고, 공부해야 할 것만 같고, 머리아픈 분야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 책은 분명히 유쾌하고! 반전이 있고! 허를 찌르는 통쾌한 매력이 있는 경제서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의문사로 마무리되는 제목부터 호기로움이 느껴지네요.
“애덤 스미스의 저녁을 차린 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의 어머니였다.”
아마도 이 한마디가 이 책의 전체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문장이 아닐까 싶네요.
저자인 카트리네마르살은 스웨덴 출신으로 유력 일간지에 금융 및 정치 분야는 물론 페미니즙에 대한 기사를 주로 게재하였고,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건대, 저는 이 책을 보면서 우선 그녀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공부에 쏟아부었는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인용하는 수많은 학자들의 주장과 연구자료를 읽으며 방대한 지식을 쌓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죠. 그런데 단지 방대한 공부량에 놀란 것이 아니라 저자가 본인만의 이론, 주관적 주장을 매우 뚜렷하게 갖고 있음에 박수치고 싶었습니다. 응당 정보의 홍수 속에 빠지면 무엇이 내 의견이고 남이 의견인지 헷갈리게 되고, 남의 의견이 내 의견으로 둔갑하면서 오히려 나만의 이론 전개가 어려워지는데요. 카트리네는 자신의 주관을 갖고 각종 논거와 근거자료로 탄탄하게 뼈대를 잡고 살을 붙여나갔음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 .
이 책의 주인공은요... (비록 소설을 아니지만)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닙니다."경제적 인간"이지요.
정통 경제학자들이 가장 현실에 부합하다고 주장하는 인간상이나, 저자는 첫 장부터 그것은 허구라고 하는 것에서도 예상할 수 있다시피, 이 책 전반에 걸쳐 반박합니다.
경제학의 바이블 '국부론'을 집필한 애덤은 여성의 집안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경제활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푸줏간 주인, 빵집 주인 등 (음식을 올리기 위한 과정에 수반되는 모든 인물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죠. 그의 이러한 주장은 어떻게 본다면 굉장히 설득력 있는 주장일지 모릅니다. 실제 그는 이 분야에서는 실로 대부라고 불리울 정도이니 그의 주장과 이론이 널리 설득력을 얻었음은 자명하죠. 하지만 이 책의 제목처럼 "그 저녁 누가 차려주었어요?" 라고 묻는다면 과연 뭐라고 대답할까요?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시험 답안지에 쓰면서도 어머니가 매일 저녁을 차려준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깜빡 잊거나 묵과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푸줏간 주인이나 빵집 주인처럼 자신의 이기심과 이익추구를 향한 욕구때문에 아들에게 저녁밥상을 매일마다 차려주었을까요? 경제학의 대부라고 불리울 만한 엄청난 학자와 바이블인 국부론이 탄생하는 역사적 순간에 노모는 아무런 이기심없이 묵묵히 저녁밥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아들을 위해 더더욱 노모는 자신의 체력과 노동을 무대가로 자식과 가정에게 바쳤더랬죠.
시카고 학파를 비롯한 주류경제학에서 주창하던 경제적인간은 로빈슨크루소와 매우 닮아있습니다. 무인도에서도 재빨리 체제를 창출해내어 화폐없이도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므로 가장 효율적이게 가장 비용이 적게드는 경로를 선택하며,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며, 완전한 독립체이죠. 모든 인간을 경제적인간의 모습으로써 묘사했지만, 철저히 그것은 남성의 모습일 뿐이었죠. 남성만이 항상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존재이며 이 과정에서 여성은 배제되었습니다. 대신 자기이익 극대화와는 전혀 정반대, 즉 '타인 돌보기'라는 임무가 주어졌죠. 왜냐하니, 애초에 출산과 생리라는 신체적인 제약을 갖고 태어났기에 합리적일 수가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한 제약을 갖고 태어난지라 여성은 천상 양육, 청소, 빨래와 같은 가정일에 매진하게 되는데 이는 교환가능한 유형의 재화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 다시 공적영역에서 밀리게 되었고, 경제라는 영역은 여자에게는 그야말로 함부로 발들일 수 없는 성역이 되고 말지요. 어떠한 합당한 근거도, 설득력 강한 모델도 없이 그저 생체적인 문제로 女性은 비생산적 존재로 취급되고 끊임없이 사적 영역, 즉 가사일에 시달리게 되죠. 실제 짐바브웨의 한 어린 여성은 새벽4시부터 밤9시까지 쉴새없이 가사일에 매달리고 가족 구성원을 돌보기 위해서 희생하지만 당연하게도 무보수이며, 경제학적 모델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존재죠. 그녀의 노동력은 천연자원과 같아서 측정의 필요성을 못느껴 'GDP에 넣을 필요가 없다'라는 것이 논거 아닌 논거구요. 남녀를 각각 이기적인 모습과 자기희생적인 모습으로 양분한 채,
우리는 성 불평등을 굉장히 자연스럽게 여기며 기나긴 세월을 지냈으며, 현재도 결코 변한 것 없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대한 갈망 속에서 좀 더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개체가 되기를 지향하고 또 희망하죠,. 하지만 우리는 경제 모델 속에는 늘 포함되지 않았던 여자들의 무보수 노동이 세계빈곤 및 성차별, 성불평등으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더이상 외면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려는 욕망 뒤에 움직이는 비하인드 이코노미. 거기에는 수많은 무보수 가사노동이 숨어져 있음을 자각할 수 있었어요.
미혼이었던 애덤스미스가 한 평생 의존했다던 그의 어머니 마거릿 더글라스. 비록 애덤은 어머니의 공짜 저녁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매일마다 먹으면서도 '공짜 점심이란 없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전파했지만, 우리는 이제라도 알아야겠습니다. "공짜 돌보기도 없다"는 사실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