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쁜 봄
심상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낙원, 유토피아, 무릉도원, 이상향, 천국... 이런 게 있다고 하자.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날씨는 일 년 내내 포근하고 시원하겠지. 먹을 것은 넉넉하겠지. 쌀과 고기, 과일과 생선, 술과 안주... 사람들은 한 번도 싸울 일이 없고 더구나 살인 같은 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저마다 제 할 일이 있고 그 일에 걸맞은 대가를 받아서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곳이겠지.
심상대의 장편소설 <나쁜봄>을 읽었다. 신문에 소개된 기사를 보고 읽고 싶어졌다. 다른 게 아니다. 그의 소설에는 ‘...것’이란 표현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는 데에 눈길이 머문 것이다. ‘것’을 쓰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다니... 그것도 짧은 시나 단편소설이 아닌 장편소설을. 궁금했다. ‘것’을 쓰지 않으면 문장이 좀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제목도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봄’은 희망, 생동, 소생, 초록, 푸근함, 설렘, 활기 이런 뜻 아닌가. 그런데 그게 나쁘다니.
<나쁜봄> 속 ‘우리고을’은 자연 환경이 비옥하며 원하는 직업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어 사람들은 즐겁게 일하고 생산한 것을 조화롭게 나눈다. 신선한 음식이 풍부하고 환경오염이나 스트레스 따위는 찾을 수 없으므로 대개 180세까지 장수하곤 하지만, 언젠가부터 특이한 유전병이 전해 내려오게 되었다. 모두가 미남미녀이며 그중 절반 이상이 불임이고 봄이 되면 광증을 보이는 젊은이가 번번이 나타난다는 것이 그 증상이다.
정월 ‘큰보름날’엔 ‘망련초’로 만든 ‘정씻기 술’을 마셔 지난해의 기억을 잊고 새롭게 자신과 연을 맺게 될 사람을 정한다. 이를 ‘새낭군맞이’라고 부른다. 오랫동안 한 사람과 함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해 짝을 바꾸는 사람도 있다.짝을 정하는 데엔 남녀노소 아무런 제약이 없으나, 함께 살다 출산한 적이 있다면 다시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없다. ‘우리고을’에서는 불임 탓에 아이 역시 온 고을 사람이 공유하는데, 자칫 각별한 애착이 생겨 ‘가족’을 부활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봄철 젊은이의 광기 외에 이곳을 위협할 만한 요소는 딱히 없어 보인다.(출판사 책 소개에서 인용)
소설은 새봄에 일어나는 살인 사건으로 시작한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과 그의 젊은 부인이 살해당한다. 그런데 범인 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머지 한 명도 죄를 자백하고 화형을 당한다. (이 마을에는 해마다 광증을 보이는 남녀 한 명씩을 공개 화형시키는 특이한 제도가 있다. 무릉도원에서 ‘화형’이라니!) 하지만 그 과정에 뭔가 미심쩍은 점을 발견한 주인공은 끝까지 사건을 추적하고 마침내 진범을 찾아낸다.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이 소설은 간단한 추리소설이 아니다.
우리고을에서 광증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기행이 우리 아닌 ‘나’를 드러내는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고을 전체의 기이한 조화와 결속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지다. 마침내 밝혀진 열다섯 살 진범은 ‘우리 고을의 이름과 자기를 낳아준 여자 사람을 자기가 부르는 말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 여자를 도와 자기를 낳도록 한 남자를 부르는 말도 알고 싶었다. 그 말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건 살인의 직접적인 동기였다. 어머니, 아버지라는 말은 이 마을에는 없는 단어였고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었다.
마을의 어른인 도서관장은 이야기한다. “상상력은 아상(我相)의 세계로 들어서는 통로라네. 위험한 정신 영역이지. 우리고을에서는 개인이란 존재는 전체를 위한 하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아! 누구든 독립된 세계를 가져서는 안 돼! 더군다나 그 상상의 세계를 다른 사람 앞에서 떠벌리는 행위는 위험천만한 일이야.”(252쪽) 또 말한다. “공동 식당에서 어울려 밥을 먹는 우리고을 사람들을 생각해보게. 그들이 저마다 다른 상상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봄물에 방개가 기어나오듯 저마다 제가 옳다고 난리를 치지 않겠나. 여보게, 상상은 생각과 정신의 부패한 현상이라네. 이기심과 자존심의 다른 양식이지. 우리고을에선 아무도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선 안 된단 말일세.”(253쪽) “우리고을에서는 누구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선 안 돼. 그런 생각은 죄가 되지. 이전에도 말했다시피 우리고을에서 개인은 하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네.”(289쪽)
조지 오웰의 <1984>나 <동물농장>을 보는 듯하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같다. 누구든 나의 실존에 대해 의구심을 갖거나 나의 부모는 누구인지 생각하면 안 된다. 정해져 있는 틀 속에서 자신을 맞춰 살아야 한다. 궁금해 하는 건 죄악이다. 궁금한 것을 말하면 화형당한다. 어디에서 많이 보던 장면들이다. 이러한 전체주의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체제를 <동물농장>과 <매트릭스>에서 봤을 뿐인가.
우리의 현대사는 과연 이보다 얼마나 달랐을까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 현대 역사에서 아주 긴 기간 동안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우리는 무엇인지, 우리 겨레는 무엇인지, 우리 역사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억압당했고 그런 것을 말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기도 했다. 그것을 무릉도원이고 낙원이라고 윽박지르는 몇몇 사람이 있는 반면 나머지 모든 사람은 그것을 독재라고 하고 전체주의 국가라고 하지 않았나.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되었고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까지 나아간 남쪽은 좀 나아졌다고 할 것인가, 3대 세습 왕조로 복귀한 북쪽은 또 얼마나 심하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나쁜봄>은 그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다.
333쪽 소설을 읽으며 ‘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건 알 수 없었다. 읽다 보니 궁금해지지 않아졌다.
2015. 1.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