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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7년
에트가르 케레트 지음, 이나경 옮김 / 이봄 / 2018년 11월
평점 :

p.37
매년 6월이 시작할 때면, 우리 가족은 모두 라마트간에 있는 중앙 광장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가면 수십 개의 테이블에 책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우리는 저마다 다섯권씩 골랐다. 가끔은 그 책의 저자가 앉아서 헌사를 적어주기도 했다. 누나는 그걸 정말 좋아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좀 못 마땅했다. 자기가 그 책을 썼다고 해서, 내 소유의 책에 낙서를 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특히 약사가 쓴 것처럼 글씨가 엉망이라면, 게다가 저자가 굳이 사전에서 찾아야하는 어려운 단어를 써놓았고, 찾아보니 고작 "즐기다" 정도의 뜻이라면 더욱 그렇다.
-> 히브리어 도서주간이라는 공식적인 명절과 함께한다는 것이 인상 깊어서 밑줄 :)
p.42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사실 나는 비행기를 타는 것 자체도 좋아한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보안 검색을 받거나 기내에 마지막 남은 자리는 일본인 스모 선수 두 명 사이 좌석뿐이라고 설명하는 수속 창구의 무뚝뚝한 항공사 직원을 만나는 상황을 말하는 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 사이, 천국과 땅 사이를 떠가는 양철 상자 안에 갇히는 부분이다. 세상과 완전히 차단되고, 진정한 시간이나 진정한 날씨도 존재하지 않는 양철 상자. 이륙에서 착륙까지 지속되는 중간지대의 그 매혹적인 한 조각이 나는 좋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내게 그 비행은 단순히 항공사의 냉소적인 카피라이터가 "높은 고도에서의 즐거움"이라고 명명한 따끈하게 데운 식사를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은 세상에서 분리되어 사색하는 때다. 비행은 전화가 울리지 않고 ,인터넷도 안 되는 값진 순간이다. 날아가는 시간은 허비하는 시간이라는 격언 덕분에, 그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불안이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잇고, 유용하게 써보겠다는 야심을 전부 벗어던지고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여지를 얻는다. 행복하고 바보 같은 존재로,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들지 않고, 그저 그 시간을 가장 즐겁게 쓸 방법을 찾는 데 만족하는 그런 사람으로 말이다.
p.96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코끼리 투어를 했는데, 형의 코끼리가 내 코끼리보다 몇 걸음 앞서갔다. 두 마리 모두 경험 많은 태국 사람이 몰고 있었다. 몇백 미터를 간 뒤 형의 코끼리를 몰던 사람이 형에게 코끼리를 몰아보라고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그 태국 사람은 코끼리를 몰아보라고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그 태국 사람은 코끼리 뒤쪽으로 옮겨갔고, 형이 코끼리를 맡았다. 형은 그곳 사람이 하던 거섳럼 코끼리에게 고함을 치거나 발로 툭툭 차지 않았다. 그냥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코끼리 귀에 뭐라고 소곤거렸다. 내가 있는 곳에서 보니, 코끼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형이 원하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이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과 십대 시절 내내 가졌던 느낌. 형에 대한 자부심과 자라서 형처럼, 목소리를 높이 필요 없이 코끼리를 몰아 원시림을 가로지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 말이다.
p.107
"아빠" 레브가 물었다. "저 아저씨가 뭐라고 했어?"
"저 아저씨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재빨리 말했다. "차에 타고 있을 때는 다리 움직일 때 조심해서 물건을 부수지 말아야 한다고 했어."
레브는 고개를 끄덕이고 밖을 내다보더니 잠시 후 다시 물었다. "그럼 아빠는 저 아저씨한테 뭐라고 했어?"
"나 말이니?" 시간을 조금 벌어보려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저 아저씨 말이 다 맞지만 할말은 조용히, 예의 바르게 해야지 고함을 치면 안 된다고 했어."
"하지만 아빠도 고함을 쳤잖아." 레브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내가 말했다. "잘못한 거지. 그래서 말이야, 이제 사과할거야"
......
"하지만 아빠"
"이제 저 아저씨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야해."
나는 우리 앞에 앉아서 땀을 흘리고 있는 기사를 보았다. 그가 우리 대화를 전부 듣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세 살배기에게 사과하라고 청하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택시 안은 긴장감이 터져나갈 듯 고조되었다. "아가, 너는 똑똑한 꼬마고 세상에 대해서 이미 많은 걸 알지만 아직 다 아는 건 아니지. 네가 아직 모르는 것 중 하나가 미안하다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거야. 그리고 운전을 하면서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하는 건 아주, 아주 위험해. 미안하다고 말하다가 사고가 날 수도 있거든. 하지만 그거 아니? 우리가 저 아저씨에게 사과해달라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보기만 해도 미안해하는 걸 알 수 있으니깐."
"아빠, 나는 아저씨가 미안한지 모르겠어."
그 순간 노르다우로 들어서는 비탈길에서 기사는 다시 한번 브레이크를 꽉 밟더니 핸드 브레이크까지 당겼다. 그는 몸을 돌리더니 아들에게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레브의 눈을 쳐다만 보더니 아주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 지난 뒤 이렇게 속삭였다. "믿어줘라, 꼬마야. 미안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정말 내 조카 생각나서 빵 터져서 웃었다. 유치원 선생님의 실수에 끝까지 '엄마 선생님이 나한테 사과해줬으면좋겠어'라고 말하던 내 조카랑 레브랑 너무 닮아서 ㅋㅋㅋㅋㅋㅋ!!)
p.111
내게는 신이 없지만 누나에겐 있고, 나는 누나를 사랑하니 그 신을 약간은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p.120
*앵그리버드에 대한 가족의 이야기 중-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가 말했다. "네 걸 훔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이고, 그러기 위해 목숨을 희생하라고 가르치는거지"
p.136
#뚱뚱한 고양이들
*레브가 유치원에서 영양사와 비밀협정을 맺어 초콜릿바를 5개씩 얻어먹어 에트가르 케레트와 아내 시라가 소환 당한 일.
"리키 선생님은 네가 초콜릿을 다 먹고 다른 애들이랑 나눠 먹지도 않는다고 하시더라"
"응, 애들은 학교에서 단 걸 먹으면 안 되니깐 나눠줄 수 없어"
"그렇구나, 하지만 애들이 학교에서 단 걸 못 먹는데 왜 너는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애가 아니니까." 레브가 능글맞게 웃었다. "난 고양이잖아."
"네가 뭐라고?"
"야옹, 야옹, 야옹"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이미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처벌과 비난의 위험을 감수하고서 범법을 저지르는 이유를 이해해보려고 오랫동안 노력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따지고 보면, 올메르트는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몇천 달러를 짜내기 위해 항공료를 위조했을 때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히르손도 자기가 일하던 조직에서 돈을 횡령했을 때 굶으며 지내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레브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보니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들은 내 아들처럼 자기가 고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속임수를 쓰고, 남의 것을 훔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p.185
구급차 안에서 야물커를 쓰고 있는 구급대원이 내가 아주 운이 좋다고 한다. 그런 사고에 사망자가 한 명도 없다니, 기적이라고 한다. "퇴원하자마자 제일 가까운 예배당에 가서 아직 살아 있는 것에 감사 기도를 드리세요." 휴대전화가 울린다. 아버지다. 학교는 잘 다녀왔는지, 아이는 이제 자는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한 것이다. 아이는 자고 있고 학교에서도 잘 지냈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아내 시라도 잘 있다고 한다. 방금 샤워하러 들어갔다고. "무슨 소리니? 아버지가 묻는다. "구급차 사이렌 소리요." 내가 말한다. "방금 거리에서 구급차가 한 대 지나갔어요."
오 년 전,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시칠리아에 갔을 때 아버지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다고 했다. 뒤에서 스피커로 살먼 선생님은 수술실로 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계신 거예요?" 내가 물었다.
"슈퍼마켓에 왔어." 아버지는 잠시도 지체 없이 대답했다. "스피커에서 누가 지갑을 잃어버렸다는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할 때 너무나 진짜 같았다. 너무나 자신만만하고 행복한 목소리였다.
"왜 우니?" 지금, 아버지가 전화로 묻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구급차가 응급실 옆에 서고 구급대원이 문을 활짝 연다. "정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p.208
"하지만 왜 날 지켜주고 싶었어?"
"널 사랑하니까, 내 아들이니까. 아버지는 항상 아들을 지켜줘야 하니까."
"그런데 왜? 왜 아버지는 아들을 지켜야 돼?"
"있잖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끔 아주 힘들기도 하거든. 그러니까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적어도 지켜줄 사람 하나는 옆에 있어야 공평하지."
"아빠는? 이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빠는 누가 지켜줘?" 레브 앞에서는 울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