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시장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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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낯선 이름이 아니다.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 모음집을 첫 권부터 꼬박꼬박 챙겨봤던 내게 김성중이란 「허공의 아이들」과 「국경시장」으로 그 이름을 드러낸 정말이지 젊은 ‘상상력’의 작가다. 이 빤한 세계가 지겨워,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힘겨워, 땅에서 살짝 발을 떼어낸 김성중의 인물들. 그들은 우리보다 조금 더 높은 고도의 공기를 맡고, 희박한 산소량에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 투명하고 달콤한 내음에 중독되어 쉽게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슬며시 손을 내민다. 영원한 행복은 보장하지 못하지만, 짧은 순간 불타오를 쾌감을 선사하겠다며 매혹적인 웃음을 날리는 김성중의 인물들. 그들의 손을 잡고 『국경시장』의 달빛에 오늘밤을 맡겨보자.

 

젊고 파격적인, 섬뜩한 상상력

‘이야기’는 무엇에서 시작되었나.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달콤하고 행복한, 하지만 불가능한 상상을 하는 어린 몽상가들에게서 시작되지 않았나. 하늘을 난다거나, 내일 아침 일어나니 호그와트로부터 입학통지서가 와있다거나 하는. 달디 단 사탕을 입에 물고 스르르 잠에 드는 듯한 기분은 우리들의 유년시절을 구성하는 하나의 추억이 된다. 하지만 김성중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잠들기 전 침대처럼 따뜻하거나 안락하지 않다. 사탕처럼 마냥 달콤하지도 않다. 잔혹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펼친 상상의 나래는 도리어 내 몸을 옥죄어오는 족쇄가 되고, 내 정신을 훔쳐가는 황홀한 마약이 된다.

‘기억’이라는 부정형의 화폐만 있으면 누구나 부자가 되고, 사고 싶은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거대한 시장이라는 환상적인 상상은 끔찍한 파국으로 막을 내린다.(「국경시장」) 모든 방면에서 우월한 천재가 되어 이름을 날리고 싶다는 아주 보편적인 욕망은 ‘질병’으로 치환되어 고통스러운 선택권을 선사한다.(「쿠문」) 혹은 살육에 대한 선택권으로 모습을 돌변한다.(「필멸」) ‘나무힘줄피아노’라는 몽환적인 동화는 실제 ‘식물과의 교접’으로 이어지고, 같은 얼굴을 가진 타인들이라는 나무의 저주로 흘러간다.(「나무힘줄피아노」) 어렸을 적 모두가 해봤을 달콤한 상상은, 어서 잠에서 깨라는 듯이, 끔찍한 악몽이 되어 몽상가의 새벽을 채운다.

 

새로운 시도, 실험적 소설

김성중의 상상력엔 한계가 없다. 단순히 놀라운 환상의 세계 구축으로만 말할 작가가 아닌 것이다. 그녀의 상상력을 더욱 부추기는 원동력이 있다면 바로 소설에 관한 기존의 관념, 규정을 이탈할 수 있는 패기가 되겠다. 「동족」의 주인공은 인간도, 신도 아닌 동물이다. 단순히 화자라던가, 객관적 관찰자로서의 기능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주인공이 ‘암컷 코브라’인 것이다. ‘그녀’로 불리며, ‘여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뱀은 뱀답지 않게 글을 읽고, 인간의 말을 알아들으며, 삶을 성찰하고 욕망한다.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은 소설답지 않다는 기존의 관념을 뱀답지 않은 뱀으로 허물어뜨려버린다. 「동족」의 소설적 완성도는 그 어떤 인간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뱀이 말을 알아듣는다’는 조금은 식상한 상상력을, 뱀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한 차원 격상시켰다고 볼 수 있다.

실험, 하면 「관념 잼」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겠다. ‘저기, 우리의 주인공이 걸어오고 있다.’(65쪽)를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김성중의 상상력이 소설에 대한 기존 관념을 깨뜨리고 더욱 부상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낙경씨’라는, 인물로서의 character인지, 단순히 성격과 성질로서의 character인지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우리의 주인공은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관념으로 존재할 뿐이다. 사물이 미쳐 날뛰고, 어느 날 곰돌이 유리병에 갇히는 식의 사건과 서사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니다. 낙경씨의 관념과, 작가의 어마어마한 지위가 잼처럼 버무려진 이 소설은 그 자체로 실험이고 도전이며, 그녀의 상상력이 어떤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이 된다.

 

적확하고 아름다운 묘사, 문장

김성중은 주로 상상력으로 말해지는 작가다. 실제로 그녀의 소설이 대부분 환상적인 세계에 발붙이고 있고, 그 환상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평가다. 하지만 내가 소설들을 읽으며 의외로 감탄한 부분이 있다면, 미적으로 무척 아름다우면서도 적확함을 포기하지 않는 묘사들이었다. 그녀의 문장은 차갑고 딱딱한 겉모습에 적확한 표현을 담고,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속에 감성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묘사를 담는다. 이를테면 ‘가로등과 네온사인은 아침 햇살 때문에 빛나는 지위를 잃어버린 것이 부끄러운지 창백해져 있다.’(202쪽, 「한 방울의 죄」) 같은 문장은 어떠한가. ‘독이 퍼지자 세상은 끓기 시작한 우유처럼 부옇게 엉겨붙었다’(117쪽, 「동족」) 같은 표현은 또 어떠한가.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한없이 문학적이다. 이런 완전한 문장들로 구성되는 상상력의 세계라니, 칠첩반상이 따로 없다.

 

흥미로운 상상력에 실험적인 도전정신이 더해져 흠 잡을 데 없는 문장으로 표현되니, 김성중, 이제 믿고 보는 작가가 됐다. 볼리비아의 해군을 떠올리며 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없는 바다를 위해 훈련을 해온 선장의 배에 탄 승객이 되어, 우리도 믿고 읽을 수밖에. 그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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