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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장강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뒤에 실린 권희철평론가의 수상작가 인터뷰에 의하면 ‘대의를 위한답시고 결국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허무하게 잃고 난 뒤에야 광기 어린 발작 끝에 천하의 악당이 되었다가 끝에 가서는 실망스럽게 회개해버리는, 무협지의 등장인물에 어울리는 이름’(178쪽)이다. 사실 이보다 두 배는 더 긴 묘사인데, 너무 길어서 전략.슬픈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며 책을 읽어냈건만, 작가 이름에다가 이런 드립을 치면 독자들은 언제 울었냐는 듯 깔깔 웃어버리게 된다. 맞다, 장강명. 전장에서 장비와 함께 투포환을 휘두르며 비열한 적들을 몰살시킬 것 같은 그런 이름인데, 실제로도 문학계라는 전장에 나와 투포환을 휘두르며 상들을 휩쓸고 있다. 잠깐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그가 또 뭔가 상을 받았다하니, 이 땅에서 함께 소설을 쓰는 것도 아닌 내 마음에 작은 질투와 커다란 부러움을 불러일으킨다.(심사평 중 이기호 소설가의 말을 빌려보았다.)
그를 처음 만난 작품은 한겨례문학상을 받은 『표백』이었다. 심상치 않은 제목의 이 소설은 심상치 않은 파격적인 내용과 묘사로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잊지 못할 충격을 선사했다. 그리고 다시,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은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은 역시나 심상치 않은 제목을 지니고 있으나 『표백』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와 심상으로 나를 압도했다. 『표백』이 지나치게 날카로웠다면, 『그믐』은 지나치게 너그러웠다. 그리고 이들 ‘지나침’은 내가 가진 기존의 세계관을 허무는 지나침이었기에, 반드시 필요했고, 또 좋았다.
그래서 『그믐』의 지나친 너그러움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우주 알이 들어온 다음, 남자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추리소설과 SF를 좋아하던 평범한 소년은 살인을 하고, 온갖 풍파를 겪은 뒤, 우주알을 품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남자, SF적으로 너그럽다. 아주머니의 칼을 받고, 살아남은 자들을 위해 진실보다 이로울 거짓을 퍼뜨리는 남자는, 정말이지 ‘우주알’을 품었을 때만 가능한 인물군상이며, 때문에 우주알의 역할은 소설 속 ‘너그러움’의 원액 수준이랄까.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런 지나친 너그러움은 우리가 세계를 보는 획일화된 패턴을 비틀어 볼 기회를 제공한다. 남자를 너그럽게 하고, 아주머니와 여자를 너그럽게 끌어안는 우주알, 말 그대로 이 소설의 핵심 ‘알’이다.
사람 잔인하게 짓밟고 괴롭히고. 영훈이가 아주머니 닮아서….
소설 속 여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남자와 연애를 하는 상대역임에도 불구하고 아주머니보다 특별한 임팩트를 주지 못한다. 다만, ‘아! 이래서 여자가 필요했군!’을 느낀 장면이 있다면 바로 여자가 아주머니에게 ‘상식적인 화’를 마구 퍼붓는 장면이다. 우주알에 힘입어 상식적이지 못한 너그러움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다가 드디어 독자를 배려해 사이다를 콸콸 쏟아주는 기분이랄까. 그러고 보면 여자가 인상 깊지 못한 인물이었던 이유는 다른 두 인물에 비해 지나치게 상식적이고 평범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이라는 상처를 지니고, 출판사에서 이래저래 깨지는 그녀는 우주알을 품지도 못했고, 아들을 잃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상식적이고 평범하게 남자를 위해 변호하고 화를 내고 그를 위해 울어 줄 수 있을 뿐이다. 이상적인 너그러움과 인간적인 너그러움이 잘 조합됐기에, 이 소설의 너그러움은 지나치면서도 ‘우리’를 울리고 만다.
난 널 다 용서한단다. 가슴으로 낳은 내 아들이라고 생각해.
마지막으로, 이 아주머니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아마 책 속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부분을 꼽으라면 바로 아주머니가 나오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아들’ 운운하며 남자를 걱정하고 챙기면서,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잔인하게 남자의 앞길을 막으려 애쓴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렇다고 그녀의 따뜻한 모습이 거짓이나 위선, 가식으로 느껴지진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왜 저럴까’하는 의문과 약간의 안쓰러움, 약간의 불편함을 남길 뿐. 어쩌면 우린 모두 한낱 인간이기에, 서툴렀던 것뿐일 테다. 자식을 죽인 살인마에 대한 증오와 ‘용서’라는 거의 불가능한 사명이 섞이고 섞여 곤죽이 되어버린 진심 속에서 ‘진실’을 건져올린다는 것이. 어쨌든 확실한 건, 아주머니가 하는 말들은 모두 진심이었다는 것. 그래서 우린 그녀를 ‘미치광이’로 치부할 수 없었고, 이런 결말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살인마’라고 단정하는 대신 두 손을 모으게 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소설, 참으로 너그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