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 모래시계 - 30분, 어린왕자와 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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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막연하게 모래시계가 갖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온라인 구매 이런거 몰라서 그냥 저냥 시간이 흘러 지금에서야 샀다. 


시간을 측정해보니까 30분 + 20~30초 정도 걸린다. 


색깔도 사진 상으로는 조금 쨍해 보이기도 하고 어린아이 아이템 같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어린왕자 그림에 유리 위.아래 그라데이션이 되어서 조화가 좋고


내 녹색 책생이랑 대비되어 잘어울린다. 


그리고 의외의 매력을 끈 것은 바로 모래시계 안에 모래였다. 

하얀색인데, 모래시계가 내려오면서 모래가 쌓이고 빛에 반사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반짝임이 움직이는듯해서 보는 재미도 있다. 


알라딘은 굿즈만 사는 건 처음인데, 아주 만족스럽다. 


다만 아쉬운점은 이 모래시계를 오프라인으로 사고 싶었는데, 

종류가 별로 없기도 했고, 유리라서 색깔코팅 찍힘. 약간의 흠이 보이긴 한다. 

어린왕자 문구랑 일러스트에는 흠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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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 하 - 제3판 한국사연구입문
한국사연구회 엮음 / 지식산업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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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길러진 “끄나풀”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당시에는 국가가 없다는 이유로,  “피식민지인”이라서 혹은 “배우지 못해서” 휘둘리고 당했지만

2024년은 대한민국이 아직도 식민지인지,

국민들이 아직도 '배우지 못해서'인지 다시 되묻고 싶다.







https://youtu.be/l3gFZxCO8DI?si=UWSn_s_aKbro0UvR

(사도광산 등재 문제)


일제시기 지방지배체제의 주요한 특징은 도와 면의 통치(자치) 기능을 강화함과 동시에 조선인 유력자들을 자치(자문)기구나 공공단체(조합) 등에 적극적으로 포섭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요컨대, 총독부는조선의 지방사회를 지방행정기구만이 아니라 도평의회(도회), 부회・.읍회 · 면협의회 · 학교평의회와 같은 다양한 자치 및 자문기구, 또는계통농회·금융조합 · 수리조합 · 삼림조합 · 소방조 등과 같은 군 단위 공공단체와 조합들을 매개로 지배했는데, 이른바 "관료 유지 지배체제"란 총독부가 각종 ‘관료기구’와 ‘자치 자문 및 공직기구’를 총동원하여 구축한 양식을 말한다.
지방유지란 관료-유지 지배체제의 형성과정에서 성장한 총독정치의 매개자 달리말하면‘토지재산’과 사회활동 능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당국신용과 사회인망(이른 바 빽)을 획득한 지방사회의 유력자들에 다름이 아니었다. - P296

일제의 지방지배체제나 정책은 국민총력운동(1941~1945)이 본격화하면서 크게 변화했다. 가령, 징용 · 징병 · 공출 등 전시총동원정책이본격화하면서 총독부는 지방지배의 파트너로서 군면 단위 유지들보다동리의 구장이나 중견인물(중견청년)들의 정치사회적 구실이 더 중시되기 시작했는데, 이런 사실은 국민총력운동의 본격화와 더불어 ‘관료-유지 지배체제‘가 균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전시체제기 총독부에 의해 집중적으로 육성되기 시작한 중견인물들은 지방유지들과는 달리 제 스스로는 별다른 정치적 자원을 가지지 못한, 일종의 끄나풀 (agent)에 불과했다. 일제 말기 면서기 등 지방하급관료는 대부분 농산어민도장, 중견인물양성소, 농업보습학교 등 ‘중견청년 양성시설‘을 거친 이들 가운데서 충원되었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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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특강 - 개정신판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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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을 유야무야 넘기더니
2024년에도 친일파에 대한 청산은 


대한민국에 풀지 못한,  남은 숙제가 되어버렸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위해 피를 흘리고 온갖 고통을 견뎌낸 분들에게 

어제로 흘러간 광복절은 희생된 그분들에게  '면목없는 날'이 되었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신봉하고 '논쟁'으로 끌어올리려고 발악하는 것들에게 질문이 있다. 

이게 한국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었냐? 
너네만 도움받은 걸 자랑하고 싶어서 그런건 아니고?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강제성' 징용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 징병 희생자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찬반'의 논쟁이 될 수 없다. 

정신처려라. 이게 정치논리가 되는 거냐?


https://youtu.be/l3gFZxCO8DI?si=UWSn_s_aKbro0UvR




일제는 친일파들에게 명예직을 마련해 주기 위해 만들었던 중추원을 확장하고, ‘민의 창달‘을 위해 부· 면 · 도 협의회를 설치하여 일제 지방 통치기관의 예산 및 공공사업들에 대한 자문에 응하게 했다. 이 기관들은 의결권이 없는 들러리에 지나지않았고, 지방사회의 조선인 유지들의 명예욕을 채워 주어 그들을 식민통치의 동반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조치들이 대단한 은전이나 되는 것처럼 국내는 물론 세계에 선전했지만 식민지배의 본질은 변한 것이 없었다. - P152

(물산장려운동 등) 이러한 운동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토착 부르주아들은 자치운동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여론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이광수는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이라는 글을 연재했다(1924년 1월 2~6일). 여기에서 그는 한국인들이 ‘강렬한 절개의식‘ 때문에 일본정부를 상대로 하는 독립운동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지적하고, 이제는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안에서" 정치 · 산업 · 교육의 3대 결사를 만들어 민족이 처한 위기 극복을 위한 백년대계로 삼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발표되자 사회주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이광수와 《동아일보》를 격렬히 비난했고, 《동아일보》는 결국 이광수를 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153

1938년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여 한국 민중을 강제로 끌고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1939년부터는 노무동원계획을 마련하여 한국인들을 국내나 일본 기타 지역으로 끌고 갔다. 전쟁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징용은 더욱 강제적, 야만적이 되어 군청, 면직원, 경찰들이 만나는 사람을 닥치는대로 또는 농가를 습격하여 청장년을 ‘사냥‘해갔다. 그리하여 대개 100만 명 이상이 징용으로 끌려 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944년부터는 여자정신대근로령이 발포되어 젊은 여성들이 잡혀가 국내 또는 일본 군수 공장에 혹사당했고, 남방.중국전선에 보내져 일본군의 노리개가 되었다. 청년들의 전쟁터로의 동원은 그 ‘충성심‘을 믿기어려워 계속 뒤로 미루어지다가 이른바 지원병제도가 1938년부터, 1944년 4월부터 징병제가 실시되어 합계 20만명이 넘는 젊은이가 총알받이로 동원되었다. - P164

1936년 조선사상범보호관찰범이 1936년부터 실시되었다. 이는 치안유지법에 따라 사상범으로 기소되었으나 집행유예 처분을 받은 자 또는 감금상태에서 석방된 사상범을 감시하고 이들을 선도하여 전향시키고 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은 보호관찰소를 설치하고, 1940년대 말에는 ‘시국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을 만들어 보호관찰 대상자 전원을 가입시켰다. 이것은 다시 1941년 대화숙으로 개편되어 이전의 부지 안에 주택을 만들어 대상자는 물론 그 가족까지 함께 살게하면서 궁성요배, 국가제창, 군사교련, 국가습득외에 생산활동에 종사하게 했다. 또한 1942년 2월에는 조선사상범예비구금령을 발표하여 사상범은 석방되더라도 재범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될 때는 구금할 수 있도록 했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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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쓴 서양사총론 1
차하순 지음 / 탐구당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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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개론이 기본적인 서양사 지식을 얻는데 뼈가된다면
서양사총론은 그 뼈에 살이 붙이는 과정을 알 수 있다.

뼈대가 촘촘하고 커서 그런가
살까지 붙은 서양사는 어마어마하다.

하긴 유럽, 아프리카, 아랍.페르시아, 남미까지 다루니 방대할수 밖에 없다.

서양사개론도 같이 올리려고 했는데 아직 블로그 방식에 익숙하지 않다.

또,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제도와 비슷하게 선출된 관료, 지방 원로원 및 회의체들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제국은 많은 도시가 연결된 거대한 집합체였다. 1세기초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들은 로마시와 동등한 위치로 격상되었으며, 속주의 도시도 점차 자치를 획득하고 자유시 (municipia)로서 특권을 얻게 되었다속주에서 도시가 발달하게 된 이유는 경우마다 달랐다. 스페인이나 갈리아지방에서는 대체로 식민 도시가 발생하였다. 스페인의 타라코 Tarraco나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의 리옹Lyons, 브리타니아(지금의 잉글랜드)의 요크York등은 행정이나 종교행사의 중심이었다. 로마군이 20년에서 25년 동안 장기주둔하는 변경에서는 군대 막사를 중심으로 여관. 술집 · 상점이 모여 도시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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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현대사 3 - 혁명과 내셔널리즘 1925-1945 중국근현대사 3
이시카와 요시히로 지음, 손승회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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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북벌을 완수하면 민족, 국가적으로 통일이 되기에 


군벌과 결탁하던 입장이고 북벌을 완수하면 불리한 입장인 일본은 중국내 일본 거류민을 보호 명분으로 지난으로 파병한다. 그에 대한 결과는 중국민들의 엄청난 피해였다. 이 양상은 훗날 이어지는 일본이 자행하는 침략상에도 나타난다. 이 지난사변을 계기로 미국 영국 그리고 중국은 일본태도에 대해 비판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부분은 똑같은 사건은 일어나지는 않지만, 비슷한 유형의 사건은 반복된다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이 사건은 먼 사건의 조각이고,
이스라엘-하마스, 우크라이나-러시아 등 영역 다툼과 이로인한 인명사고나 전쟁 등은 나와 물리적 거리가 멀지만 

내가 지구에 사는 동안 영향이 없지 않다. 

'현재 일어나는 사건.사고가 완전히 나와 다른 차원의 역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사변은 중일 관계는 물론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치에도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첫째 그때까지 영국을 주요 적으로 여겨 온 중국의반제 운동이 명확하게 일본을 표적으로 삼게 만들었다. 둘째, 장제스 등의 대일 감정을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셋째, 제1차 산둥 출병에 동조를 보인 영국과 미국 두 나라가 국민정부에 접근하는 입장에서서 일본을 비판하게 되었다. 또 지난사변은 파견된 기관(현지 군)이 사건을 확대하고 격화시켰다. 거기에 군 중앙과 정부가 추종하여 군 증파를 단행하고, 여기에 다시 ‘지응징‘(暴應徵, 난폭한 중국에 대해 징벌을가한다)이라는 여론을 배경으로 호응하는 모양새를 띠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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