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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사생활
데이비드 애튼보로 지음 / 까치 / 1995년 11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신문 하단의 잡지 광고에서 한 줄의 글귀가 순식간에 눈에 들어왔다. '여자도 마약도 대자연만큼 나를 감동(흡인?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강렬한 단어였다...) 시키진 못했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가수 이장희가 한 말이라고 한다.

대자연...이국에서 처음 그것을 느꼈을 때 나의 감동 또한 그러했다. 나는 여자에도 마약에도 소위 '뿅 가본'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어느 것에도 자연 만큼의 감동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장희가 한 말에 '그렇지, 그렇지...'하고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자연 자체뿐만 아니라 매사에 자연스러움을 갈망하는 이유는 원초적인 본능상 거기에서 뭔가 위안과 치유를 받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매일 매일 쾌적하고 반듯반듯한 사무실에서 치열한 전투를 겪은 후 한 밤에 펴드는 이 책이 내겐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년여에 걸쳐 대자연을 구성하는 식물들의 삶을 훑어본 지금, 나는 그들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찍은 멋진 도판 사진만큼 그다지 평화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식물들의 삶, 그 속에는 말 그대로 현실과 생활이 있었다. 끊임없이 환경과 다른 식물들과 동물들과 투쟁하고, 생사를 겪고, 전략을 바꾸고 변화를 꾀하여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그런 생활... 그들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교활한 전략과 무기를 내세워 어쩌면 인간들보다 더 처절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사무실 벽에 붙여진 무시무시하고 과격한 표어 '변화없는 발전없고 도전없는 미래없다'는 우리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식물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었다. 결국 그 말에 숨막혀하는 나를 포함한 생물들은 약자에 속하며, 언젠가는 도태하게 될 운명들임이 분명하다.

모든 인류의 행복과 평화. 모든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

결국 이것은 불가능한 꿈일 뿐일까? 자연의 조화 속에도 생존을 위한 투쟁이 있다는 사실. 아니, 그 투쟁으로 인하여 자연의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사실. 그렇담, 더 예리한 칼과 더 두꺼운 방패를 준비하여 매일 매일 전투를 치뤄내야 하는 것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인 것인지...

왜? 저 높은 곳에 계신 분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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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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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보기 싫은 것을 똑바로 보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 때의 느낌이란 '살에 메스를 댄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만큼 두렵고 가슴이 시리고 아프며, 시간이 지나도 그다지 상쾌하고 가벼워지지 않는다.

요즈음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중매체가 상업성을 내세워 아름답고 부담이 없는 것만을 너무나 잘 선정하여 보여주고, 또 우리는 그러한 것만을 선택하여 취한다. 보거나 들어 기분 나쁜 것이라 해도 적절히 요리하면 소위 '짜릿'한 것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그러다 보니 점차 '보기 싫은 것'이 있는지 조차 잊어버릴 때가 있는 것 같다. 이창동 감독이 만든 <박하사탕>이나 <오아시스>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우리가 보기 싫어하는 것만을 골라 결코 아름답지 못한 그 모습을 낱낱이 해부하여 날 것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결코 '보기 싫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없을 것이다. 그것들을 인식하고 포용하여 '더불어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의무라면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반드시 그것들을 쳐다보아야 한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모습을 '해부'한다는 책들이 최근에 많이 발간되었다.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기대를 가지고 읽은 한 유명인사의 책도 그저 문제점들을 '짜릿한' 예를 들어 수다스럽게 늘어놓는 정도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그러나 최근에 읽은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읽는 내내 가슴이 서늘할 만큼 그동안 내가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 예리한 메스를 들이대고 있었다. 박노자의 이력을 인터넷에서 대강 읽고는 복잡한 경력의 한국인이라 생각했지만, 책 표지 뒷장에 있는 모습은 놀랍게도 아주 젊은 러시아인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학자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한국어와 한자 실력 뿐만 아니라 한국사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폐쇄적인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자(!) 귀화했으면서도 감히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 말하며 이방인의 입장에서 칼날을 휘둘러대고 있다. '우리들의 대한민국'으로는 제 살을 찢는 아픔일 것 같아 제목을 '당신들의...'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그런 비판을 할 수 있는 요인 중의 하나는 대학시절 러시아가 부패하고 몰락해가는 것을 보면서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고 갈망해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에 넘쳐나고 있는데도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냥 일상적인 일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물리적, 심리적 폭력성과 비인간성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주장이 너무 편파적인 건 아닐까....? 그러나 그동안 지나치게 편파적으로 '멋진 것'을 보아왔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의 글이 별로 거슬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상적으로, 종교적으로 그의 말에 동의하기 어려운 면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가 언급한 주제들은 한번쯤 깊이있게 생각해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들이다. 저자 박노자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된 것을, 우리를 날카롭게 해부해줌을 기꺼이 감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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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만화) 3 - 활짝 핀 아가씨들의 그늘에서 - 고장의 이름 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만화) 3
마르셀 프루스트 원작, 스테판 외에 각색 및 그림, 정재곤 옮김 / 열화당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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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가고 집을 정리하면서 큰 숨을 들이쉬고 예전에 주변인들과 주고받았건 편지들을 찢어버렸다.

편지를 넣어두는 서랍만 보면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그 편지들은 항상 나를 불편하게 했다. 언제든지 나의 내면과 내가 겪은 일들을 증빙함으로써 나의 과거를 '까발릴'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해서 내 과거가 그렇게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불행하고 죄악으로 덮여있는 것도 아니었다. 찢어버린 편지들 중에는 행복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더 많지만, 왠지 그것들은 현재의 내겐 아주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로 여겨졌다.

그래서 프루스트가 15년간이나 수행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내는 작업이 단순히 행복한 회상이 아니라 얼마나 큰 고통이 되었을 것인지 감히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말 그대로 미성숙한 시기(좋은 말로는 순수할 때인가...), '풋내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던 시절은 멋모르고 즐거워했던 기억 사이사이 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들이 끼어있으니, 더더욱 회피하고픈 기억일 것이다.

열화당에서 올해 번역되어 나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세 번째 권은 바로 이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성에 눈을 뜨고, 세상이 '그녀'들로 인해 분홍빛으로 보이던 시기, 그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치한 수작을 일삼던 시기...그것은 그 시절을 지나온 나같은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아름다운 시절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작년에 나온 2권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책도 만화라고 쉽게 보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될 만큼 정중하고 품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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