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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진보 - 카렌 암스트롱 자서전
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카렌은 20세가 되기도 전에 수녀원에 들어가 7년을 보냈지만, 자신이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신을 느끼지도 못하고 수녀원의 혼갖 규율들에 실망한 후 결국에 환속하게 된다. 그후 공부와 학자로서의 길을 걸으면서 또한 자신의 인생의 톡특한 시련을 통해 신의 의미, 종교의 의미들은 그녀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금씩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런 여정들이 나선형계단을 한바퀴돌아 자신이 간절히 만나고자 했던 그리고 간절히 이해하고 싶었던 신에게 조금은 다가간 진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다분히 주관적인 그녀만의 일기 같은 책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허락했으므로 그녀의 자서전적 일기를 엿보게 된 독자인 나는, 그녀가 걸어가는 계단은 도대체 위로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지 모르는 또 다른 미로와 같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리스도교 신자로 수녀원에 들어갔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담아낼 수 없었던 신을, 신의 부재라 생각하고 무신론 (불가지론)자로 변신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삶 가운데 그녀가 정말로 철저한 무신론자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녀 마음의 한 구석에 늘 남아있었던 신에 대한 이미지, 자기를 보담아 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야기해 줄 것 같은 그런 인격적인 신의 형상을 자기의 머리 속에서 과감히 제거해 버릴만큼의 결단은 내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역사와 함께 전수되는 현자들의 지혜와 학문적인 지식을 통해 그녀는 순례의 결론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한다. 최소한 자기 삶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이성의 범위한에서, 그리고 자신에게 최대한 솔직함으로 그녀가 신에 대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 비춰졌던 인격적인 하느님 예수님의 모습들 (혹은 신학적 교리들로 설명할 수 있는)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개념이었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 그녀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고, 어차피 인간의 사유체계로 담아낼 수 없는 놀이라면 실천적 행동이야 말로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방편이라 생각한다. 이런 실천적신앙과 공감을 통해 종교간의 벽을 허물고 모든 종교간의 화합을 꿈꾸게 된다. 이런 그녀의 꿈은 배타적인 종교인들의 태도에 혐오를 느끼는 현대의 사조와 적절히 맞아 떨어져 그녀에게 더할 수 없는 확신의 동기를 주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오래 전 교회 청년부에서 조장을 맡아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같은 성경공부그룹에 나이가 많은 형이 있었는데, 우리가 다른 종교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이라도 말하게 되면, 그 형이 늘 하는 말이 있었다. "우리가 남의 종교에 대해 떠들어 댈 필요도 없고, 우리가 믿고 있는 것 열심히 믿고 행동하자고" 난 이말이 참 멋있게 들렸다. 지금도,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어쩌면 이 말보다 더 적절한 말은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가진 성경에 대한 믿음의 불확실성이나 종교 상대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나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열심'은 나와 다른 믿음을 가진자들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 열심은, 결국 내가 내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까지 내가 아는 것처럼 착각하는 교만이며 나에게 솔직하지 못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카렌의 진보(?)적 생각들을 긍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나는 그녀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만일 그녀가 그녀의 진보적 생각들을 그녀만의 일기로 적어놓았고, 그것을 그녀의 허락도 받지 않은채 내가 몰래 그녀의 일기들을 읽을 수 있었더라면, 나는 속으로 그녀의 생각들을 더 이해하고 싶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깨달음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일기를 책으로 만들었고 (이책은 인기를 끌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녀의 깨달음을 읽어주고 공감해 주기를 바랬다. (아니면 세상의 독자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기도해 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도 그녀의 생각에 동의만은 할 수 없는 입장이 있다는 것도 알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예수에 대해 늘 궁금함을 가지고 산다. 왜 굳이 신(하느님) 이 주관하는 인간의 역사에 예수의 개입이 꼭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인간의 죄때문이 였다면,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피의 댓가의 상징성없이라도 용서하실 수 있었을거라는 상상은 할 수 있다. 공의의 하느님이기 때문에 용서의 댓가에는 반드시 피의 희생이 필요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면, 그 절차를 만드신 하나님이 그 절차에 굳이 속박되지 않더라도 용서를 하실 수는 있지 않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상상은 하나님의 이끌어가시는 섭리에 비할 수 없으며, 그리고 사실 나의 상상대로 되어진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꼭 필요했던 것은, 인류의 죄의 문제의 해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필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구약을 통해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마치 카렌이 그녀의 인생을 통해 여태것 알수 없었던 것 처럼) 하느님의 모습이 예수님의 짧았던 공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분명히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후에 도래한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을 담는데 실패를 거듭한 이유는, 어쩌면 그들이 인간으로서 카렌의 말대로, 하나님의 모습을 머리 속으로 담아낼수 없는 존재로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통해 우리가 보았던 그 모습이야 말로, 우리가 알았어야했을 하나님의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유함으로서 죄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 남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던 한 많던 간음한 여인 에서 성난 군중들에게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씀하시며 그녀를 용서하신 예수, 병든자와 천한 세리들에게 다가가 마음을 나누고 친구가 되어 주었던 예수, 궁극적으로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 죽음을 선택한 예수의 모습은 아주 먼 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런 예수의 모습이 내 삶 속에서 함께 했던 하나님의 모습이었고, 나에게 있는 생명의 가치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원천적 힘이었다. 카렌이 수녀원에서 갈망했던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눈에 보이고 손에 느껴지는 신을 만나길 기대했을까? 매일 잠자리에서 그녀의 귀에 들리게 소곤소곤 말을 해주시는 하느님을 기대했을까? 대체 무엇이 그녀가 수녀원을 나왔어도 그녀를 그토록 신에 대해 절망하게 만들었을까? 수녀원의 입구의 거대한 문앞에 짐가방을 들고 서있는, 약간의 초초한 눈빛이었을 약간은 상기되어있었을 십대의 모습을 지닌 그녀를 , 까마득한 과거로 돌아가 만날 수 있다면, 그녀를 토닥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