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지음, 윤주현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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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가톨릭출판사 2024.2)

찬미예수님~
캐스리더스 3월의 도서는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입니다. 발타사르의 책은 내용적 무게가 있어서 쉽지 않은편이라 마음 먹고 읽어야 하는데요, 이번 책은 일단 두께가 상당히 얇습니다. 그리고 내용도 크게 어려운 부분 없이 핵심 포인트만 적혀져 있어서 발타사르 책이지만 무난하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예전에 장례식엘 갔었는데 가장 가슴이 찢어질 고인의 어머니께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시고 누구보다 열심히 연도를 드리시는 모습에 놀란적이 있었다. 문상객이 애통해하며 서럽게 우니까 오히려 엄하게 화를 내셨다. 정서적으로 참 생소한 광경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많이는 아니지만 몇 번 다녀온 장례 미사때에 오히려 고인의 지인들이 눈물을 닦고 있지 정작 가족들은 크게 우는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릴 때 어른들이 아들 있는 집은 상가집이 조용하고 딸이 있어야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며 아들보다 딸이 낫다고들 말씀하시기도 했는데 심지어 어떤 분은 딸만 셋인데 아무도 안울고 있었다. 워낙 어릴 때 봤던거라 이유는 기억이 안나지만 신문 칼럼에서 한국인과 서양인의 장례식 눈물의 차이를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3월 캐스리더스 도서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를 읽고 드디어! 그 의문이 해결이 되었다. 한국인은 장례식 때 우리곁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로 아쉽고 애통해서 서럽게 우는 것이고 서양 문화는 그리스도교가 바탕이기 때문에 죽음을 통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이기에 울지 않는 것이다.

일반적인 죽음의 의미는 생명 전체가 모든 기능과 함께 정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단순히 ‘무’ 나 ‘절멸’이 아니다. 자신을 선사해주신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상태이다. 이전의 인간에게 죽음이란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시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써 가장 수준 높은 생명의 상태에 이르셨다. 그로부터 인간에게 죽음은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는 영원한 생명의 희망적 메시지를 주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당신의 죽음만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을 위해 돌아가셨으므로, 당신의 생명력 안에 보편적인 죽음을 일치시켰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보편적 가치를 갖는 죽음을 향해 집중되어 있으므로, 그 분께서 선사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이 죽음에서 출발하여 성체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스도 인들에게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는 죽음에서 생명을 살게하는 성사들이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가지 실재는 순수 현세적인 것에 대해 금욕하고 그리스도의 사명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가운데 살아가게 한다.

인생에서 가치있는 것을 살려면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 산 이들은 하느님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숨어 살기 위해, 죽을 운명으로 조건 지어진 이 세상에서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던 존재는 저 천상에서 진정 자기 존재를 인격적이며 삼위일체적인 차원에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이를 위해 살아가는 ‘이타적 존재’가 된다.

이상은 가톨릭 출판사 3월 캐스리더스 서평 도서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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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믿음
헤르만 헤세 지음, 강민경 옮김 / 로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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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믿음 (헤르만헤세, 로만-가톨릭츨판사)

 

이 책은 세계대전을 겪으며 자본주의, 민족주의에 의해 점점 사라져가는 인류의 문화와 도덕을 담당했던 종교와 풍습의 필요성에 대해 쓴 헤세의 글이다. 나의 믿음은 특정 종교와 문화를 떠나 인간 영혼을 채워줄 수 있는 헤세의 믿음에 관해 생각했던 글들을 모은 책이다. 헤세는 인간 유형을 현실적 인간과 종교적 인간으로 나누어 각 유형의 특징을 이야기한다. 현실적 인간은 이성을 신뢰하고 권력을 추구하며 지구를 착취하는 유형이다. 종교적 인간은 경외심을 품고 살아가며 인간을 지구의 부수적인 존재로 여기며, 자연과 예술에서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끼는 유형이다. 인간의 유형을 두가지로 나누는 것이 억지스러움을 헤세 스스로도 인정 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누어지지만 세상은 양 극단의 기둥사이를 오가며 돌아가기 때문에 서로 모순적으로 보이는 극단은 어떤 것이 더 우위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 줄타기를 하며 살아가는 하나임을 깨달아가는 것이라고 결론을 이야기한다.

헤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으나 교회가 권력과 경제 논리를 추구하며 종교가 아닌 종교 이론에 집착하는 기독교에 거부감을 가지게 된다. 헤세는 불교에 심취하였고, 흰두교에 빠져들었으며 중국 철학인 노자 공자 장자에 몰두하였다. 또한 헤세는 로마 가톨릭이 가진 장점을 부러워하였으나 신약 성경을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 여기며 개종을 하지는 않았다. 헤세는 루터가 부패한 가톨릭의 폐단을 지적하며 개혁만 했다면 훌륭한 종교 개혁가로 남았겠지만 어느 하나 더 나은 것 없는 새로운 종교를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 때문에 루터를 여러 차례 비판하였다. 헤세는 여러 종교를 두루 찾아다니며 완전한 자신을 찾으려 애썼다. 헤세는 완전한 자신은 자의식부터 가져야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며 자신의 뿌리는 개신교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세속화 된 교회와 종교 지도자들에게 불만이 있지만 자신은 개신교 신자라고 밝힌다. 헤세는 신약성경과 중국 철학 내용의 유사성을 연결지어 이야기하기도 한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지만 불교 흰두교 중국 철학 가톨릭을 두루 체험한 헤세는 어느 종교가 우월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각 종교들은 진리의 다양한 모습이기에 삶이란 양극 사이에 있는 다양함을 오가며 그 속에서 일치를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어느 특정 종교를 떠나 권력과 경제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인간의 영혼을 위하는 일에 보다 더 큰 가치를 두고 인간 자의식을 찾아 보다 완전한 자아를 찾아야 함을 강조한다.

 

헤르만 헤세의 나의 믿음을 읽으며 토마스머튼의 영성 강의에서 봤던 박재찬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 신부님께서는 너도 맞고, 쟤도 맞고 다른 모든 종교를 진리로 인정하는 것은 다신교이기 때문에 가톨릭 교리와는 맞지 않다고 하셨다. 우선 내 종교 교리에 대해 확실하게 공부를 하고 나서 그 다음 예수님께서 타 종교를 바라보시듯, 예수님의 시선으로 타 종교인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인정해주라고 하셨다. 헤세의 책이 가톨릭 교리와는 약간 차이가 나지만 나만 옳고 내 종교만 최고라 여기고 다른 종교들을 비난하여 종교 전쟁을 하는 것보다 훨씬 유연해서 읽기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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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순례
허영엽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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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출판사 캐스리더스 2월의 도서는 허영엽 신부님의 성경순례입니다.

창세기가 하느님의 인간 창조에서부터 내용이 시작이 되어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창세기 공부를 할 때는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같은 느낌이라 지상의 이야기가 아닌것만 같았다. 그래서 창세기 공부할 때는 성조의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어도 언급되는 지역의 위치가 궁금하지도 않았고, 지도에서 찾아본다는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이집트가 존재하는 국가라 그런걸까? 창세기 마지막 즈음 요셉이 이집트로 간 이야기에서부터는 비로소 인간계와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탈출기로 넘어와서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인들이 겪은 노예 생활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이집트가 수도를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갔을까? 그 당시에 저렇게 불렸던 지명이 지금은 어떻게 불리고 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경로로 이집트를 탈출했을까? 궁금해하며 성경지도를 옆에 두고 열심히 찾아가며 읽었다. 지도를 찾아보며 탈출기를 공부하는 와중에 가톨릭 출판사 캐스리더스 2월의 도서 선택 문자가 왔다. 하느님께서 내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셔서 바로 딱 그때 그 시점, 성령께서 찾아오시듯 가톨릭출판사 캐스리더스 이달의 도서, 허영엽 신부님의 성경 순례가 내게 왔다.

성경 순례는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장은 성조시대, 제 2장은 이집트 탈출과 가나안 정복, 제 3장은 왕국 시대 및 유배 시대, 제 4장은 예수님의 발자취, 제 5장은 바오로의 선교 여행이다. 각 테마에 맞추어 성경에 언급된 부분과, 지리적 위치, 역사적 특징,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알려주며 흥망성쇄를 거쳐 지금 현재 그 지역의 상태에 대해 소개한다. 성조시대에 언급된 프니엘을 예로 들면, 32장 31절 야곱의 씨름이야기가 나오던 프니엘에 대한 소개와 프니엘의 지리적 위치가 나오고 판관기에는 프누엘로 언급이 되어있음 이야기 하고 판관기에 등장한 부분과, 1열왕기에 언급된 부분을 소개한다.

이스라엘 순례를 다녀온 적도 없고, 중동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어서 그동안 몰랐던 지역들이지만 성경 순례 책을 통해 꼼꼼하게 들여다보다보니 그 곳에 대한 약간의 감이 생긴 듯 하다. 창세기와 탈출기 성경 공부를 했기 때문에 1, 2장은 신나게 읽었다. 3,4,5장은 신약 부분이라 나중에 성경 공부하며 다시 찾아 볼 생각으로 쭉 쭉 읽어 넘겼는데 책 끝에가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되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사도 요한이 성모님을 모시고 살았던 집이 터키 에페소에 있단다. 흥미가 생길 내용이라 이야기 하고 싶지만 가톨릭출판사 영업이익을 위해 책 사서 읽어보시라고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가톨릭출판사 사순특강 가서 좋은 말씀 많이 들었으니 보답으로 자세한 내용은 책을 각자 읽으시라고 권하며 성경순례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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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단 하나, 사랑 발타사르 신학 시리즈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지음, 김혁태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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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가톨릭출판사 캐스리더스 7기 1월의 도서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의 『남겨진 단 하나, 사랑』 입니다.

이 책은 고유명사가 많고 철학자 신학자들이 다수 등장해서 처음엔 어렵게 느껴질 수가 있는데요, 책 소개 문구인 「발타사르의 ‘신학적 미학’을 통해 만나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두고 생각해보면 아주 쉽게 읽혀집니다. 미학이라는 것이 예술 작품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철학으로 이야기하는 학문이듯이, 신학적 미학이라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철학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책이겠구나 생각하시면 이 책에 대한 기본틀은 다 잡으신겁니다.

그렇다면 신학의 근거로 철학을 가지고 온다면 다시 중세로의 회귀일까? 그리고 신앙은 믿음이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지식적으로 접근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을 지식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잘 없는데 의아하게 여기던 부분이었습니다. 발타사르는 책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철학이나 인간적 학문으로는 절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인간의 이성을 납득 시키기 위해서는 지식적인 내용으로 알려주는 것이 필요한데 완전하지는 않지만 철학이나 심리학이 어느 정도는 이끌어주는 역할은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철학안에서 인간은 존재의 심연에 대해 자신을 근거로 알 수 있는 바를 찾아낸다. 실존에서는 자신을 근거로 살 수 있는 바를 끝까지 살아낸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생각이나 삶, 앎이나 행동에서 인간의 자기 이해가 지닌 초월론적 전제 속으로 해체되어 버린다면, 그리스도교적인 핵심은 말살되었다고 할 수 있다. (p.82-p.83) 》 지식으로 아무리 이야기해보려 하지만 절대적 신의 이야기를 인간의 언어로는 다 담지 못합니다. 《 사추덕의 모든 차원과 여기에 하느님과 연관되는 관계의 뛰어난 방식들이 모두 자체적으로는 도달할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어리석은’ 척도 위에 세워짐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이때 사추덕의 심오한 의미는 무의미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럼으로써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만 보이는, 철학을 통해서는 볼 수 없는 초의미를 획득하기 위함이다. (P.224)》


그렇다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구약에서의 하느님은 심판하시는 하느님이시기도 하기에 사랑하지 않으면 심판하시어 벌주신다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또 생길수도 있습니다. 《 하느님의 분노로 작열하는 심연을 열어젖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타는 심연을 여는 것과 하나로 묶여있다. (p.153) 》 심판은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시기에, 모두를 구원하시고자 지옥의 바닥까지 가셔서 영혼들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느님 구원의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랑이 있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책에서 그 답을 찾아봅니다. 《하느님 사랑이란 그리스도의 사랑, 새 계약이요 영원한 계약의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마음 속 깊은 동정으로서의 사랑’, ‘ 기꺼이 받아주는 너그러운 개방성’, ‘겸손의 마음가짐’, ‘반항하지 않는 부드러움’, ‘인내하는 끈기로서의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참을 수 없는 동료 인간을 극복하고 견디어 내며, 하느님께서 용서하셨기 때문에 용서한다. (p.218) 》 왜 참을 수 없는 동료 인간을 극복하고 견디며 사랑하라고 하실까요? 《 이 사랑이 구약 성경 전체에 걸친 인간 교육의 우선적 목표점이다. 하느님을 닮은 마음이 되게 하는 교육 말이다. (P.219) 》


어려워서 울며 시작했다가 웃으며 나오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의 『남겨진 단 하나, 사랑』 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릅니다. (1요한 4,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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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오빠 2024-03-04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학이라는 것이 예술 작품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철학으로 이야기하는 학문이듯이, 신학적 미학이라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철학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책이겠구나 생각하시면 이 책에 대한 기본틀은 다 잡으신겁니다.

라고요? 아니요. 발타살은 그런 개념을 미학적 신학이라고 비판합니다. 철학개념을 이용해서 하느님 사랑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에서 출발하여 아름다움을 보는 것, 신학에서 시작해서 십자가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신학적 미학입니다. 다시 읽어보세요.

belleunhi 2024-03-05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은 다 안읽어보셨군요.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남을 비방하라고 어느 종교에서 가르칩니까. 신앙에서 철학을 이렇게 이야기 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며 나름 해석한 부분입니다. 책에서 인간의 학문이 신에 대해 설명못한다 했다고 저 글 뒤에 분명히 썼습니다.
 
일뤼미나시옹 - 페르낭 레제 에디션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지음, 페르낭 레제 그림, 신옥근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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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가 어릴때는 라틴어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라틴어를 분석 해체하고 재배치하며 시를 쓸 만큼 어린 랭보는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하고 네 자녀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게 교육을 한 부작용 때문인지, 랭보는 사춘기 이후 종교와 사회에 극단적으로 반항하며 가출을 하기 시작하면서 학교도 그만두게 된다. 나는 랭보의 언어를 소화 못시키기 때문에 랭보의 시를 단어 하나하나 파헤치며 읽어내지를 못한다. 일뤼미나시옹 시집의 절반 가까이가 옮긴이의 해제였다. 설명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시집이다. 역자도 랭보 시의 의미를 알기는 힘들다고 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역자는 랭보의 삶이 그의 시를 이해하는 것 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랭보의 가정환경과 그의 반사회적 성향들을 알고 보면 랭보 시에 자주 등장하는 항구 바다 배의 의미를 알 것 같다. 흔적으로 남은 과거와 새벽 해가 떠오르는 오른쪽 길을 그의 희망으로 읽으며. 일뤼미나시옹 시집 맨 처음에 있는 대홍수 시를 보면 노아때의 대홍수를 다시 일으켜 세상을 뒤집고 싶어하는 랭보의 마음이 보인다. 그랬던 랭보였기에 막 신혼생활을 시작한 폴 베를렌을 설득해서 함께 유럽 전역을 여행 다니며 동성적 애정 행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랭보는 사회가 하지 말라는 것들을 열심히 했다. 그러니 그 당시 행과 열을 열심히 지키며 운율을 따지고 있던 시의 형식을 다 깨부수고 문장으로 시를 써버렸다. 젊고 잘생긴 남자가 해서 그런가? 그 시절 랭보의 파격 행보들이 워낙 센세이션 해서 사람들 입에 계속 오르내렸단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해 아래 새것은 없다고 랭보가 산문시를 처음 쓴 것도 아니고 이미 고대에 쓰여진 일리어드 오딧세이부터가 산문시인데 랭보가 뭐 새롭고 특별한지 모르겠다. 단지 그것으로 끝났으면 지금 우리가 랭보를 알지 못했을거다. 사회적 파장을 심하게 일으켰던 랭보의 시가 그 이후의 문학의 판도 마저 바꿔버려서 랭보가 랭보인듯하다. 초현실주의가 시작되던 그 시대적 상황과도 잘 맞았다. 그러면 랭보 이전에는 다 직설적인 시만 썼을까? 자기만의 상징과 은유로 시를 쓴게 랭보만 그랬나? 그것도 아닌데 시대가 천재를 만든게 아닌가 싶다.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나는 일반인이라 정해진 궤적을 걷는 행성이고, 랭보는 천재라서 유성처럼 자기만의 길을 가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잣대로는 랭보를 이해할 수 없어서 랭보의 위대함을 내가 못 깨닫는 것 일수도 있다. 책에 이야기는 없지만 나는 시인 랭보 보다는 커피 팔았던 랭보가 더 인상적이었다. 랭보는 절필하고 아프리카로 가서 수백년동안 무슬림 영역으로 외지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에티오피아 하라 지방에 커피 무역상으로 파견되었다. 유럽에 처음으로 아프리카 커피를 수출한 사람이 랭보란다. 디테일하게 따지자면 랭보가 다닌 회사였지만 그 일을 한 직원이 랭보였다. ^^ 충분히 예상한대로 랭보는 아프리카 가서 커피만 팔지 않았다. 커피값이 떨어져서 돈이 안될때는 총기 장사도 했다. 제도권 안과 밖을 넘나들며 다이나믹하게 살던 랭보는 다리 염증으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절단했지만 결국 낫지 못하고 서른 일곱의 이른 나이에 죽게된다.
일뤼미나시옹 시집은 랭보가 아프리카에 커피 장사하러 가 있던 동안 랭보가 죽은 줄 알고 전 애인이었던 폴 베를렌이 고인 랭보의 시를 모아 만들어진 시집이었다. 이 시집을 낼 때 입체주의 화가 페르낭 레제가 선뜻 자신이 삽화를 그린다고 해서 랭보 시와 페르낭 레제의 그림이 콜라보 되었다. 이번에 문예출판사에서 원본을 최대한 살려 한국어판으로 냈는데 빨강 초록의 커버 색감 포인트가 출간 시점이었던 크리스마스 즈음의 느낌과 잘 어울린다.

문예출판사에 보내주신 일뤼미나시옹 시집 덕에 초현실적인 연말을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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