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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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팔당호를 끼고 돌다보면 다산유적지에 다다른다. 넓고 깨끗하게 가꾸어진 공원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서로의 이야기로 만들어 간다. 다산유적지를 끼고 돌다 작은 샛길로 접어 들어가면 기와 고운 작은 성당이 있다. 마재성지다.

십자가에서 한 손을 내려 인간의 손을 맞잡아 주는 예수그리스도가 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한 손을 내린 그의 손을 꼭 잡고 자신의 시간을 부탁하곤 한다. 나도 그랬다. 마재성지를 돌아 나와 이제는 관광지가 된 능내역에서 아이스케키통이며 우체통을 감상하며 다리 힘을 비축한 다음 다시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어쩌면 죽어라 밟다보면 두물머리에 도착한다.

다리 건너 세미원에 연꽃이 필 때도 좋고, 스산한 바람에 따뜻한 햇살이 물드는 가을도 좋다. 핫도그 하나를 우물거리면서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걷다보면 강물이 만나는, 그야말로 두물머리에 도착한다. 그 곳에서 잠시 흐르는 물이 정말 만나고 있는지를 살피다가 저 멀리 보이는 수종사를 바라보고 다시 왔던 길을 기우는 시간과 함께 돌아온다.

두물머리는 흑산의 주요 배경 중 하나다. 마재 성지도, 정약용 생가가 있는 다산 유적지도 그렇다. 흑산을 읽으면서 내게 익숙한 곳이 등장하니 내용 하나하나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과 황사영은 이곳에서 자신의 선택하고 걸어가야 할 길을 닦았다. 흑산은 천주교 세례를 받고 사학죄인(邪學罪人)이 되어 쫓기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흑산에는 정약전의 흑산 유배기와 사학죄인으로 쫓기고 죽임당하는 민초들의 이야기가 얽혀있지만, 나는 정약전이 아닌 이름 없이 살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들이 수없이 외웠을 기도문에서 찾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주여, 우리를 매 맞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어미 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게 하소서.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을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주여, 주를 배반한 자들을 무도 부르시고 거두시어 당신의 품에 안으소서.

주여, 우리 죄를 묻지 마옵시고 다만 사하여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p.58-59)

 

그들은 매 맞아 죽었다. 노비라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에 목말라서.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진 것 보다 많은 것을 당연하게 요구하고 빼앗아가는 위정자들과 그들에게 기생하는 자들로 인해 굶어 죽었다.

그들은 어미 아비 자식이 뿔뿔이 헤어져 살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고 팔렸다. 어미는 제 자식을 두고 남의 집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살다 죽었다. 오라비는 살기 위해, 오래 전에 헤어진 누이를 만났다는 기쁨을 두려움과 바꿔 누이를 죽였다.

그들은 살고 싶었다. 하늘나라에서 얻는 평온보다 현실에서 평온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으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들의 바람이 현실에서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절실함을 이용해 서로를 배반하게 만들었고 죽던가, 죽은 것처럼 살던가, 죽은 것보다 비참하게 살던가를 선택하게 했다. 어느 한 쪽도 기울어짐 없는 참혹함이 묻어있는 선택이었다. ‘흑산(黑山)’이나 자산(玆山)’이나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그들은 배반한 사람들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다고 했다. 어떤 선택도 그들의 죄만은 아니기에. 다만 주님께서 사하여 주시기를, 불쌍히 여기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누구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죽었고, 누구는 배신으로 삶을 이어갔다. 죽은 이는 성인(聖人)이 되고 산 이는 배신자로 기록되었거나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 모두 자신의 길을 살았으니 무게를 잴 수 없는 그들의 모든 삶은 같은 것이다. 그들 모두 그 이전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도 누구를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다. 나라를 팔아먹은 것도 아닌 것을.

그렇다. 모두가 성인(聖人)이 될 수는 없다. 모두가 성인(聖人)이 될 필요도 없다. 누군가는 그렇게라도 살아남아야 하니까그래야 이어갈 수 있으니까

나에게 국가의 이념에 반한다는 이유로

천주교를 버리지 않으면 죽음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

그러면 나는

차라리 죽음을 달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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