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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평점 :
『해변의 카프카』, 『1Q84』 이후 무라야마 하루키의 책을 읽지 않았다. 『해변의 카프카』를 읽을 때는 삶의 여유가 없었고, 『1Q84』를 읽을 때는 세상과 너무 많은 것을 타협하고 있었다. 그래서 글자를 읽었을 뿐 내용을 읽지는 못했다. 그의 글이 보여주는 세계를 따라가는 것에 급급해서 그가 무엇을 보여주려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솔직히 어느 부분에선 지치고 지루했다. 처음은 좋았으나 결과는 처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개인의 취향이니까.
처음 기사단장 죽이기가 세상에 나왔을 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무라야마 하루키의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앞섰기 때문이다.
『해변의 카프카』, 『1Q84』 모두 읽다가 멈추다가 또 읽다가, 시작한 것을 끝내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동원시켜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나는 프롤로그에 등장해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얼굴 없는 남자에게 강하게 끌려 나는 기사단장 죽이기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나’와 어떻게 연결되었을까?‘라는 강렬한 호기심이 다시 무라야마 하루키를 만나게 했다.
이야기는 초상화를 그리는 ‘나’가 마주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일들. 누군가가 그려 놓은 빅 픽처 속에서 일어나는, 일어나야만 했던 것들은 순서대로 흐트러짐 없이 일어났다. 다소 길고도 지루하게 늘어지는 대사들과 묘사들이 함께 어울리며.
읽어가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글 속에 묘사되는 사람들의 옷 색깔을 떠올리고, 풍경을 그려보고, 등장하는 음악들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고 장면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지닌 배경이 미약한 것인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 책을 정말 ‘읽었다’라고 하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함께 등장하는 ‘와타루(강을 건너다) 멘시키(색을 면하다)’. 나는 화자보다 이 남자에게 더 많은 흥미를 느꼈다. 그가 프롤로그에 등장했던 얼굴 없는 남자가 아닐까? ‘나’가 강을 건널 때 만난 얼굴 없는 뱃사공. 멘시키이면서 멘시키가 아닌 존재.
책을 읽는 내내 기사단장과 구덩이, 방울, 멘시키, 그리고 ‘나’가 만난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가 궁금했다.
그러나… 나의 궁금증과 호기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책을 읽고 난 후 모든 것은 일상으로 돌아갔으나 무언가 하다 만 기분은 그저 나의 기분 탓인가? 내가 바란 이야기 전개는 무엇이며, 결말은 무엇이었나? 무언가 자신이 지닌 역할을 해야 하는 것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채 사그러진 느낌. 처음부터 중요하게 등장했던 기사단장의 역할은 그렇게 끝나야만 했을까? 멘시키도, 구덩이도…. 그 방울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무언가 더 나아가야 하는 지점에서 머뭇거리다 되돌아 온 아쉬움이 든다. 시즌2가 있나?
시작은 참으로 흥미로웠으나, 끝은 역시…로 마무리되었다.
오늘은 책꽂이에 묻혀있던 해변의 카프카를 다시 한 번 꺼내 읽어야겠다. 이제는 여유도 있고 나이도 들었으니 그때와는 다른 느낌이지 않을까 궁금하다.
“확실히 저는 나이를 먹어갈 겁니다.” 멘시키는 말했다. “앞으로 신체 능력도 떨어지고 점점 고독해질 테지요. 하지만 아직 그 나이를 살아본 적은 없습니다. 어떤 것일지 대강 짐작은 가지만 그 실상을 실제로 목격하진 않았어요. 그리고 저는 직접 눈으로 본 것밖에 믿지 않는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어떤 것을 보게 될지 기다리는 심정입니다. 특별히 두렵지는 않습니다. 큰 기대는 없지만, 다소 흥미는 있어요.”(p.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