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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전쟁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자신이 가진 능력을 돈을 버는 곳에 쏟어붓는 주인공 이태민은 시대의 흐름을 파악했고 시대를 따라 흐르는 돈의 맥을 알았다. 그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5년 내 500억을 벌어 캐나다로 떠나고자 하는 그의 꿈은 곧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이태민의 승승장구 기록만으로 소설은 흘러가지 않는다. 무기에이전트로 일하는 도중 발생한 일련의 사건으로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중국행을 선택하고 그곳에서 누군가에게 쫓기는 소설가 전준우를 만나 그의 소설이 담긴 USB를 넘겨받게 된다. 그 소설로 인해 전준우는 누군가에게 피살된다. 소설은 이태민이 소설 내용을 바탕으로 전준우의 죽음을 파헤치는 현실과 전준우의 소설 속 과거가 공존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책이 겉표지를 둘러싼 띠지에 적힌 한 문장
‘조(吊)를 가진 자들이 조(弔)를 없앴으니… 이제 남은 것은 답(畓), 한 글자뿐.’
이 문장이 전준우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풀어갈 실마리다. 한자는 중국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 세상에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동이(東夷), 즉 우리나라에서 먼저 만들었다는 것을 숨기려는 자들에 의한 음모와 살육의 현장이 시간을 관통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었다.
은나라와 공자와 사마천이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전준우의 소설.
한의 문진대회에 참가한 유일한 여자인 이지가 설명하는 ‘답(畓)’. 고구려, 백제, 신라, 옥저, 동예 등의 문사들은 알지만 한의 문사들은 모르는 글자. 논농사를 짓는 나라의 문사들만 아는 글자를 통해 한자를 중국에서만 만든 것이 아리라는 것을 증명한다. 집 안에서 돼지를 기르는 동이(東夷)만의 독특한 문화를 반영한 글자 ‘가(家)’를 설명하며, 집 가나 논 답은 삶의 가장 기본이며 중요한 글자이므로 가장 먼저 만들어졌을 것이라 주장한다. 여기서 소설 속의 소설은 끝난다.
이태민은 전준우의 소설을 바탕으로 오래된 글자전쟁의 실체에 가까워지고 이를 막으려는 공자숭모회에 대해 알게된다. 그는 돈벌이가 아닌 일에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자신이 알게 된 것을 베이징대학교에서 열리는 인문학학회에서 발표한다.
한국으로 돌아와 검사 앞에 자진 출두한 이태민은 위기를 넘기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듯한 모습으로 김진명의 소설도 끝난다.
어쩌면 개인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살아온 주인공에게 한자어에 대한 글자전쟁은 이태민 속의 또다른 이태민을 깨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전준우로 소설 속에 스며든 작가 김진명의 이야기에 더 집중했다.
한자를 만든 것이 동이족임을 강조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표현하려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자 탄생의 신비를 통해 글자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글자의 관계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글자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글자 속에는 그 글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의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인간의 물리적인 생활방식과 희노애락의 감정과 가치관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글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으며, 가치의 높고 낮음을 따질 수 없으므로 다른 민족의 글자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글자엔 사람이 담겨 있다.
풍장(風葬)의 풍습을 지닌 마을 사람들의 몰살되는 현장에서 사라진 글자 ‘조(弔)’를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한 소설 속의 소설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번에 읽어내려간 이야기. 공자와 은나라, 사마천에서 스스로의 모자람에 주춤거리면서도 재미있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