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끈 - 우리는 끝내 서로를 놓지 않았다, 개정판
박정헌 지음 / 황금시간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아빠의 잃어버린 가운데 손가락이 생각났다.
갈라진 짧은 손가락을 따뜻한 내손으로 움켜쥐면 항상 시리다.
많이 아프셨냐고 물으면 "아니 하나도 안아파" 라고 대답하시곤 했다. 그 손가락을 가진 아빠보다 곁에있는 내가 더 신경이 쓰이곤 했다. 우리아빠는 이사람 마음을 알까.
p8 겨울이 다가오면 늘 동상으로 잘려 나간 여덟 손가락들이 아리다. 이미 사라진 손가락들이지만, 온전한 손가락보다 더 빨리 얼음이 박히고 돌덩이처럼 단단해진다. 그나마 붙어 있는 손가락도 끝부분에 혈관이 부족하고 살점만 두둑해 고깃덩이와 다름없다. 하지만 이 여덟 손가락 덕분에 나는 언제나 삶을 다시 쓴다. 늘 산으로 달려 가는 꿈을 꾼다.
두발목을 부상당해 사마귀 같은 피켈을 잡고 크레바스를 기어오르는 강식과 부러진 갈비뼈의 고통을 이겨내려는 저자의 모습은 강했다. 아이젠과 자일같이 생명을 지탱해줘야 할 것들이 반대로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음은 참으로 묘했다.
5mm의 자일이 두 사람의 생명을 쥐고 있는 부분은 내 심장을 벌렁벌렁하게 했다.
p35 아이젠 때문에 스스로 자일을 끊은 일도 있었다. 하산하던 중 등반자가 아이젠을 떨어뜨렸다. 빙벽을 내려가기 위해서는 다른 자일 파티가 피켈로 얼음을 깎아 디딜 곳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하지만 속도가 너무나 느렸다. 곧 바람이 불고 폭풍이 몰아쳐 두 사람은 모두 동사할 판이었다. 아이젠을 떨어뜨린 등반자는 그 순간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된다. 동료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자일을 끊은 것이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끊어 주었으면 끊었으면 하는 이기적이지만 간절한 마음이 전해져왔다. 오죽했으면 그런 생각을 했겠는가. 발을 움직일 수가 없으니 두팔로 버텼고 엉덩이를 밀며 굴러 내려오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는 자꾸만 울컥했다. 온몸은 그들에게 무기가 되어주었다.
p39 첫날 들었던 새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황량한 하얀 벌판은 내 시야를 어둠속에 가두어 버렸고 날카로운 절벽은 눈위에 붉은피를 흩뿌리게 했으며 이곳은 나 자신이 내가 아니게 만들었다.
p93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이 한심했다. 스스로에 대해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산에 미쳐 이 고생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게.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욕지거리를 하면서도 산을 잊지못하고 저자는 그와 관련된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니 말이다.
나는 저자와 같이 세계적으로 높은 산을 올라보진 못했지만 우리나라 산은 열심히 다니는 편이다.
겨울산은 내 허리위까지 덮을 정도로 눈이 많이 온다. 자칫하다간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앞사람의 발자국을 밟고 가야 했다. 외줄타는것과 같았다. 콧물이 나오고 눈물이 나올 때가 있지만 겨울산행은 매력적이다. 귓속까지 아릴정도로 부는 칼바람은 나에게 빨리 내려가라고 경고 하는듯했다. 그래도 올라가고 싶었다.
산을 오르다보면 어느 순간 앞사람과 뒷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 순간 이 산에는 나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산에 오면 잡다한 생각이 사라진다. 그래서 낮은 곳에 다 두고 높은곳으로 올라오나 보다.
"산이 좋아 산에 온 거면 이길 저길을 가리는 것이 아니야"
산이 힘들어 조금 더 쉬운길로 내려가기 위해 두 갈래 길 가운데서 고민하고 있는 나를 보며 한 어른이 하신 말씀이었다. 그분은 망설임 없이 나를 제치고 갔던 기억이 난다.
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에게 오라 하지 않고 재촉하지도 않는다.
산을 오를 수 있는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