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 - 나를 묻는 밤의 독서
김운하 지음 / 필로소픽 / 201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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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이면서 약간의 불쾌감(?)을 유발하는 표지에 이끌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김운하라는 저자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굉장히 많은 책을 낸 소설가이자 비평가인데 어떻게 이렇게 몰랐을까? '카프카의 서재'라는 책은 알고 있었지만 그 책의 저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 책은 제목도 표지도 친근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나를 묻는 밤의 독서'라는 부제처럼 책에 대해 쓴 글들이어서 가독성이 좋고 읽다보면 알찬 느낌과 함께 여러 방면으로 관심이 확장되어 독자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책이지만, 마냥 건전하고 유익한 느낌이 아닌 '새벽 2시'에 어울릴 법한 감성과 오래도록 곱씹어 생각하게 하는 여운이 있다. 표지나 제목에서는 어쩐지 퇴폐미가 느껴지는데, 글쎄... 일개 독자인 나로서는 도저히 왜 이런 표지를 썼는지, 편집자의 깊은 의중을 이해할 길이 없지만.  

책에 대해 말하는 책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지는 꽤 된 것 같다. 사람들이 메타북을 통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 주변에도 메타북만을 즐겨읽는 이들이 몇몇 있는데,(메타북'만'을 즐겨읽는다는 것은 원문 전체를 읽는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정반대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않게 있었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고나면 반드시 관심을 끌었던 책을 찾아서 읽는데, 그렇게 독서를 확장시켜가는 재미를 주는 것이 메타북의 매력인 것 같다. 특히 이 책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작가들의 고전이나 알려진 명작이 아닌 다소 낯선 작가의 책들도 다루고 있어  정말 여러 방면으로 시야가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꼭 찾아 읽어야겠다고 메모해둔 책과 마음에 두는 구절들이 이렇게나 많았다.

이 책의 첫장 '내 모호한 열정의 숭고한 대상, 나는 무엇을 원해야하는가?'에서는  <위대한 개츠비>를 다루고 있어 친숙한 느낌으로 편안하게 독서를 시작할 수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감상이라면 수도 없이 읽어보았기에(그만큼 많이 인용되는 작품이기에) 식상할만도 했는데, 좋아하는 소설이어서인지 저자의 관점을 따라가는 과정이 내내 흥미진진했다. 이어지는 작품들도 딱 좋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조금씩 천천히 빠져들게하는 배열이었다. 읽을수록 점점 더... 깊이 감춰져있던 의식,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감정, 내가 몰랐던 나를 만나게 되고 인간임에도 미처 모르고살았던 인간성(인간의 성질?)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주로 밤 10시에서 12시 사이에 읽었는데도 읽다보면 새벽 2시인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나는 선함이라든가, 그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든가 하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면 할수록, 더욱 기숙이 자기 내부의 진흙탕 속에 빠져들어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어 버린다. 무엇보다 난처한 것은, 그것이 모두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이 여겨지고, 결코 병이나 변태로는 생각되지 않으므로, 결국 이 변태와 싸우려는 생각은 아주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것이 나의 정상적인 상태인가 보다, 라고 거의 믿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는 무언가 비정상적인, 비열한, 비밀스러운 쾌락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 도스토옙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중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 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 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다. 그들은 어느 날 무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 버린다. 아름다움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중

그러나 사실 어떤 역사적인 생이든, 그 생을 영원의 관점에서 내려다본다면 그저 "어느 날 무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리는허망한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반딧불이의 삶처럼.
단 한 번뿐인 생.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단 한 번뿐인 생들은 그렇게 잠시 왔다가, 봄날에 잠깐 피었다가 스러지는 봄꽃들처럼 그렇게 사라져간다.
이런 허망함을 알기에, 이런 허망함의 무의미함에 질식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 인간은그토록 집요하게 기억에, 자식이든 사회이든 간에, 누군가의 기억에 영원히 불멸의 이름으로 각인되기 위해 그토록 집요하게 몸부림치는 것은 아닌가?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내 생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나 자신이 기억하는 내 생의 기억조차도 불확실하고 파편적인것이라면, 내 생의 이야기의 의미는 무엇일까? - p119
즉,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는 이런저런 사건들과 사실들의 총체가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허구의 소설이다. 반면, 진짜 삶의 진실은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인 물리적 사건들과 사실들의 총체일 뿐이다. - p121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완전히 독자적인 전대미문의 행복감, 그 근거가 무엇인지 나 자신도 알 수없는 그런 행복감이 내 온몸에 흘러 퍼졌다. 단번에 나는 삶의 굴곡에 무관심해졌고, 삶의 재앙도 그저 대수롭지 않는 불운이었으며, 삶의 짧음도 단순히 우리 감각의 기만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내 안에서 무언가가, 보통은 사랑만이 이룰 수 있는 무언가가 일어났고, ㄱ이와 동시에 나는 어떤 진미의 물질로 채워진 듯이 느꼈다. 아니, 이 물질이 내 속에 있다기보다는 나 자신이 그 물질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평범하다거나, 공연한 존재라거나, 죽어 없어질 몸이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마르셀 과자 한 조각은 마르셀의 잃어버린 시간, 깊고 어두운 무의식 속에 갇혀 있던 시간을 순간적으로 해방시켰다. 과자 한 조각이 빚어내는 맛과 향기가 기억과 통합되어 시간의 수정이 만들어진다. 프루스트는 향기로운 시간의 수정을 말한다. "고요한, 맑은 울림과 향기를 지닌, 투명한 시간들의 수정."
파편적으로만 보였던 과거, 공연한 존재이거나, 죽어 업성질 몸이라고 생각되던 실존이 "향기로운 시간의 수정"인 기억의 연금술을 통해 현재와 지속성과 의미론적으로 연결되면서 삶 전체의 의미가 솟아난다. 삶은 더 이상 파편적이지도, 덧없지도 않고, 허무하지도않다. - p123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나와 싸우는 중이었다. 개인적인 상황때문에 책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나를 설득해야했고, 또 다독여야했고, 이도저도안될땐 미치광이처럼 울부짖어야 했다. 그런데 책속의 몇몇 구절이, 많은 문학 작품들의 사심없는 인간에 대한 탐구와 생과 사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과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들이 조금의 위로가 되어준게 사실이다. 마치 나의 고군분투에 동감하는 듯한 느낌, 마치... 생의 의미를 이해하고자하는, 삶의 무의미를 어떻게든 의미로 고쳐놓고자 있는 것 없는 것을 다 쥐어짜내고 있는 이 지랄 발광이... 응원과 지지를 받고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사람의 삶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삶도 무의미하고 죽음도 무의미하다.
+ 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 중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책들은 하나같이 아주 매력적인 작품들인 것은, 또다른 고마움이다. 이미 읽은 책, 아직 읽지않은 책을 다시한번 찾아보며 한동안 이 작품들을 통해 위로를 받기로 자처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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