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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현실에서 만드는 법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7년 9월
평점 :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 체 게바라
한번쯤 이 구호에 가슴이 두근거린 적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감히 '누구나' 그랬을 것이라고 단정해버린다. 리얼리스트, 꿈, 유토피아... 이 단어들의 조합은 어떤지 앞뒤가 안맞는 것 같지만, 그렇기에 더 현실적인 구호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꿈과 현실 사이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팩트이다. 우리는 완전한 현실도 완전한 이상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에서, 완전한 현실주의자도 완전한 이상주의자도 아닌 채로 평생을 살아가지 않던가! 이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며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주의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겠지만, 그 또한 꿈과 현실 사이의 어드메에 살고있음을... 이번에도 역시 '누구나'라는 단정을 성급하게 해버리고 싶다.
이 책은 출판되기 전부터 날 설레게했던 책이다. 곧 번역, 출판된다는 소식에 얼른 읽어보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막상 출판된 후에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한달이 지나서야 읽었는데, 꼭 바빠서만은 아니었다. 집에 이 책을 놓아두고 표지를 보며 흐뭇해하면서도 며칠이나 묵혀두었던 것은 책과의 '썸'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기 위해서였다면..............이상한가요? ㅋㅋㅋ 그냥 좀 아껴두고 묵혀두었다가 천천히 시간을 내어 읽고싶었다. 적당한 시간에. 좋은 기분으로. ^^
지은이 뤼트허트 브레흐만은 유럽의 젊은 사상가로 이 책은 네덜란드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이후 국가적 베스트셀러가 되어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지난 9월 한국어로도 출판되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책을 읽기 전에 서두에 제시된 '이 책에 쏟아진 찬사' 부분을 읽다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수많은 석학들의 찬사가 실렸으니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라(나는 추천사를 믿지 않는 편이므로) 찬사 그 자체, 그 문장들에 설레임과 들뜸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얼른 책장을 넘겨보고 싶어진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유토피아의 귀환
2. 모든 국민에게 현금을 무상으로 지급해야 하는 이유
3. 빈곤의 종말
4. 닉슨 대통령에 얽힌 별난 이야기와 기본소득 법안
5. 새 시대를 위한 새 수치
6. 주당 15시간 노동
7. 어째서 은행가에게는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는가?
8. 기계에 맞서는 경주
9. 풍요의 땅 너머
10. 아이디어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목차만 봐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신선하고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쉽고 위트있는 문장으로 쓴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 아이디어, 유토피아 플랜이라면 어쩐지 현실과는 동떨어진 공상에 철학이 더해지고 이념들이 얽혀, 현학적인 문체로 어렵게 쓰여 있을 것만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열려있다. 진입장벽 같은 것은 없다. 누구나 읽고 바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곳곳에 매력있는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들이 인용되어 더욱 흥미로웠다. 물론 오스카 와일드만 인용된 것은 아니다. 미주만도 40페이지가 넘을 정도로 다양한 인용이 흥미를 돋운다.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에 따르면, 인간은 풍요의 땅에 도달하자마자 다시 한 번 머나먼 수평선에 시선을 고정하고 닻을 끌어 올려 항해를 떠나야 한다. 와일드는 "진보는 유토피아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저 멀리 수평선은 텅 비었고 풍요의 땅은 안개에 싸여 있다. 우리는 이 풍요롭고 안전하고 건강한 장소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유토피아를 매장시켰다. 여태껏 누려온 것보다 나은 세계를 상상할 수 없으므로 지금까지 꾸어온 꿈을 대체할 새 꿈이 없다. 실제로 부유한 국가의 국민은 대부분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잘 살지 못하리라 확신한다.
무상 현금지원은 세계가 보증하는 기본소득이다.
단 몇 년 동안만 실행하는 것도 아니고, 개발도상국에서만 실행하는 것도 아니며, 빈곤층을 위해서만 실행하는 것도 아니다. 앞서 이 장의 제목이 가리키듯 누구나 수혜를 받아야 한다. 일종의 호의가 아니라 권리여야 한다. 따라서 무상 현금지원을 "공산주의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길"이라 부르자. 이것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수당을 매달 지급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 유일한 조건이라면 "맥박이 뛰는 것"이다. 무상으로 지원 받은 현금을 현명하게 사용하는지 어깨너머로 감시하는 사람도 없고, 지원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도 없다. 특별 혜택을 추가로 제공하지도 않고, 다른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하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노령자, 실업자, 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추가로 수당을 지불할 뿐이다.
이제 기본소득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사실 스위스에서 기본소득 관련 투표가 진행되었다는 뉴스에 머리가 띵할 정도로 놀란 적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미처 상상도 못해본 일이 현실적인 문제로 논의되는 세계가 있었구나... 충격일 정도로 신선한 아이디어로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저항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던 것은 관성을 따르는 본능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실험들, 여러 사례에서 드러나는 가능성들은 저항이 심했던 나를 거의 완벽하게 설득했다. 이 책은 우리의 착각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그로인해 새로운 생각으로 나아가게 한다.
광고기업 중역은 1파운드를 벌어들일 때마다 7파운드 상당을 스트레스, 과소비, 오염, 부채 등의 형태로 파괴한다. 그러나 환경미화원은 1파운드를 벌어들일 때마다 12 파운드 상당의 건강과 지속가능성을 창출한다.
성과 위주 사회의 목표는 과거 소비에트 연방이 수립했던 5개년 계획 못지않게 불합리하다. 생산통계를 기반으로 국가의 정치 제도를 수립하는 것은 만족스러운 삶을 대차대조표로 바꾸는 태도다. 저자인 케빈 켈리가 주장하듯 "생산성은 로봇에게 해당하는 용어다. 인간은 시간을 소비하고, 실험하고, 놀고, 창조하고, 탐색하는 활동에 탁월하다." 숫자로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하고, 유토피아를 달성하려는 비전이 전혀 없는 국가가 구사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놀랍게도, 이미 150여년 전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은 종국에 가서는 하루에 4시간 정도만 일하면 충분하리라고 예측했다고 한다. 카를 마르크스 역시 "누구나 사냥꾼이나 어부나 목동이나 비평가가 되지 않더라도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물고기를 잡고, 저녁에는 가축을 기르고,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는 비평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미래를 예견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경험한 후에도 우리가 이렇게 많은 시간을 일에 쏟고 있는 것은 아마도 '자유시간이 지나치게 많으면 악행을 부추길 뿐'이라는 우리 안의 고정관념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우리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고 내면의 저항 그 안에만 머무른다면 앞으로 150년이 지난 후에도 우리는 게으름과 여가라는 '악행'을 누리지 못하고 의미도 없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고있게되지 않을까? 저자는 포드의 말을 인용해 "여가가 '잃어버린 시간'이거나 계급 특권이라는 개념을 근로자의 뇌리에서 하루 빨리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누구나 멋진 삶을 살 수 있다.
이 얼마나 짜릿한 말인가! 이 문장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설렘이 느껴진다면, 우리는 같은 과다. ㅋ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현실로 만드는 데에 조금(그 이상)의 노력을 기울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말이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고 준비가 덜 된 것 같다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
여가가 있는 멋진 삶을 꿈꾸며 '염병할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심지어 그 일에 매진하고 있는 이들 역시 유토피아를 꿈꾸는 리얼리스트의 호쾌한 문장들을 타고 신나게 달리다보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조금 더 가까이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 그 희망을 몸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읽다보면 후련한 마음이 들면서 스트레스가 조금은 날아가버리는 기분이 드는 데, 그동안 통 가질 수 없었던 미래에 대한 기대감때문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