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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책을 읽기 시작한 뒤에는 책을 읽고 있는 내 시간이 없어지고 책 안의 시간만 느껴졌다. 읽다 말고 책을 덮어야 했을 때 조금 화가 났다. 해야 할 일을 미루고 계속 읽고 싶었다.
우연히 페이스북으로 이름을 접한 장강명 작가. ‘호모도미난스’, ‘열광금지, 에바로드’를 내리 읽고 나서 그동안 몰라봐서 미안했던 작가, 몇 주 사이에 장편소설 두 권을 출간하는 작가,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하는 일로 나를 바쁘게 하는 작가.
이 작품이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으로 정해진 이후 뉴스와 짧은 소감으로 먼저 전해들은 바, 그동안의 작품들과는 다르다 했다. 상처받은 존재에 대한, 개인에게 집중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동안의 작품을 좋아했기에 너무 몰랑한 이야기, 이제 뼛속까지 건조한 생활인이 된 나에게 와 닿지 않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 일까봐 남몰래 걱정씩이나 했었다.
그러나 나에겐 상처받은 개인, 그 개인의 잠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안의 한 부분이 소설 속 '남자'를 닮고싶고, 또 다른 부분이 소설 속 '여자'와 똑같다고 박수를 치며, 나머지 한 부분은 '아주머니' 마음을 알겠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주인공 세 사람 모두 내 안에 살고 있던 존재들이며 동시에 내가 아닌 척 하고 싶었던, 종이 한 장으로 덮어 두었던 나의 속 모습 이었다.
죄, 용서, 사랑.
누구나 읽고 싶어 할 주제다. 솜씨 좋은 장인을 만났을 때, 잘 짜인 카펫처럼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결의 감동을 일으키는 재료다. 소설을 읽으며 떠오른 또 다른 장인의 작품 영화 ‘밀양’ 이 책장을 덮고 난 후 머릿속에 맴돈다. 세상의 어미들에게는 자식을 향한 짐승과 같은 본능이 있음을 어미가 된 이후 나 역시 오감으로 느끼고 있다. 자식을 죽인 살인자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능력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다. 영화의 살인자는 용서를 마음먹은 어미에게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로, 같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버티던 어미의 머리채를 쥐고 흔든다. 하지만 죄인이 진실로 죄사함을 받았다면 어미를 보자마자 울며 엎드려 빌었으리라. 자신의 죄 때문에 죽지 못해 살고 있을 어미의 얼굴을 마주하지도 못하리라. 살인자에게 아들을 뺏기고, 위로 받고자 의지한 하나님까지 뺏겨버린 영화 속 어미와 아들을 죽인 아들 친구를 직접 죽이고 마는 소설 속의 어미. 새끼를 잃고도 주어진 하루를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어미들은 어떤 존재에게든 집중해서 살 구실을 찾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소설 속 아주머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식을 죽인 살인자일 뿐인 남자에게 매달려 하루 24시간을 견뎌냈다. 끝내 자신의 두 손으로 그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고행도 끝내려 했던 것이 아닐지. 나라면 그런 이유로 칼을 쥐었을 것이다. 소설의 남자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아주머니를 피하지 않았고 자신의 죽음 이후를 대비해 자신이 죽인 친구의 짧은 생이 무결했다는 고백을 유서로 남겼다. 사실이 아닌 증언일지라도, 어미는 이제 아들과 남자를 남겨두고 그 꽃길을 건너갈 수 있었을 것 같다.
소설 속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제 삼자인 내가 읽는 순간, 현실과 동떨어진 그렇고 그런 로맨스가 아니라 나도 알아본 적 있는 연애 이야기가 되었다. 지금은 희미한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나에게도 그런 감성이, 풋 소리 나게 우습지만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느낄 수 없을, 사랑이라고 명명하는 몸짓과 상상에 가장 걸 맞는 상태로 살아 본 그 때가 있었음을 깨닫게 했다. 의도적으로 다듬어진 뒤 놓여진 문장 하나하나와 이야기의 순서를 섞고 앞을 뒤로 만들기도 한 작가의 연출력에 기꺼이 홀린 것이다.
나에게 그믐이라는 표현은 옛 것이다. 달의 차고 기움을 기준으로 한 음력은 어린 시절 내 어머니의 영역이었다. 초하루의 신명과 그믐의 조용함은 나에겐 구체적이지 않다. 엄마의 입을 통해 들었던 단어들은 엄마의 해석과 함께여야만 했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 그믐은 남자가 그어놓은 끝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일까. 한 번 읽어서는 도통 알 수 없는 우주 알인가 아니면 우주 알이 선택한 외피인가. 그믐과 초하루를 구별하는 것처럼 어렵다. 어렵게 한 이유는, 꼭 알아내야 할 숙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장강명은 자신의 소설 속에서 늘 친절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