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심장 가까이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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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펙토르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이전에 발간된 소설집 <달걀과 닭> <G.H.에 따른 수난>을 통해서였다. 범상치 않았다. 이미지 조각조각, 잘 연결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서사, 그러나 분명하게 남는 어떤 인상. 그것을 쉬이 떨쳐낼 수 없어서 이름을 기억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강렬한 첫인상으로 기억하는 작가의 데뷔작 출간 소식에 반가움이 일었다. 잘 읽어낼 수 있을까? 첫 작품부터 그랬(?)을까 궁금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속 문장에서 차용된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그래서 짐작할 수 있었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번역자 님께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었다. 드릴 것이 박수 밖에 없는 독자의 이야기.

사랑하는 서점극장 라블레의 지기에게 리스펙토르의 글을 번역하기가 유난히 어렵다는 이야길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워낙 중의적인 의미가 많은 데다 어휘 하나로 쌓는 겹이 무성해서 번역자와 편집자가 고심해서 문단을 완성한다는 이야기였다. 실로 그럴 듯하다.


언어로 표현된 순간 사라지고 마는 내밀한 무엇. 감정과 인상. 내면의 소용돌이.

그런 것을 끊임없이 들여다 본다. 독자가 무엇을 읽고 있는지 알 수 없어질 때까지. 그런 순간을 엮어 소설을 완성한다.


이 대단하게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누고 싶어진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느낄 수 있는 소설도 있으니. 읽다 멈추고 멈추었다 읽는 모든 순간이 좋았다.


더불어 을유의 새로운 암실문고 시리즈를 기대하게 된다.

이제 그녀의 시간은 모두 그에게 주어졌고, 작은 얼음조각들로 쪼개졌다. 그녀는 그것들이 녹기 전에 재빨리 마셔 버려야 했다. 그러고는 전속력으로 달리라며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간만이 자유니까! 어서, 빨리 생각해, 어서, 빨리 너 자신을 찾아, 어서…… 끝났어! 이제는─얼음조각들이 든 쟁반은 나중에야 다시 나타난다. 그때 당신은 거기에 있다. 이미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물방울들을 홀린 듯 바라보며.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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