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망상
루퍼트 셸드레이크 지음, 하창수 옮김 / 김영사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자연물에 대한 관점의 이동은 이미 400년전 부터 이루어져 오고 있었다. 혹은 그 전 부터였을지 모른다. 이미 당시의 중국인과 아랍인들은 특정한 법칙에 의하여 낮과 밤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내, 자연과 종교의 고리를 한 번 쯤 흔들어 놓았다. 그들의 믿음은 그 이전과는 사뭇 다른 세계관을 보여주었다.


자연계에 일정한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유기체들에게도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으며,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증명된 사실들도 다수 존재한다.



Chapter 1. 당신은 유물론을 믿도록 프로그램화 되어 있습니까?

p.49

카르트는 머릿속에서 생각만으로 진행하는 실험인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는 동물의 움직임을 본뜬 자동화 장치를 상상한 다음, 그것들이 잘 만들어진다면 진짜 동물과 거의 구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와 같은 주장은 철저히 기계적 자연관에 기초한 것이다. 개의 신체 내부에 존재하는 장기는 일정한 법칙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지, 어떠한 목적과 추구의 방향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나아가 개의 뇌에서 작동하는 숱한 화학적 작용들은 개가 하나의 유기체로서 어떠한 가치판단을 거쳐 나타나는 양태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작동할 뿐이다. 여기에서 불확실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를 도출하는데 까지는 수 세기가 걸렸지만, 어쨌든 유기체적 자연과에서 기계적 자연관으로 넘어가던 시기임에는 확실하다. 이러한 사고실험이 없었다면, 현대의학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인간 몸에서 일어나는 심장과 혈관의 협응이 기계적인 작용이 아닌, 가치판단의 산물이라는 믿음하에서는 수술은 불가하다.



p.50

철학자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은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데카르트는 동물이란 사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계와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잇었으며 그것은 단지 인간을 (또한 인간만을) 지성적이고 의식을 가진 동물로 만들어주는 비기계론적이며 비물리적인 생각이었다. 이것은 사실 미묘한 관점으로, 오늘날 동물학자들에게는 대부분 쉽게 지지되지만 데카르트의 시대에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p.55

기계적 자연론이 오늘날 유물론을 지지하고는 있지만, 근대 과학의 선조라는 이유로 기독교를 뒤엎기는 커녕 오히려 지지하고 나섰다. 기계가 존재하려면 그것을 만드는 설계자가 있어야 한다. 가령, 로버트 보일은 자연의 기계적 질서가 신의 설계를 뒷받침해주는 증거로 보았다. 그리고 아이작 뉴턴은 신을 자신의 상상 안에서 '역학과 기하학에 매우 뛰어난 기술을 가진 존재'로 인식했다.



과학의 발전에 있어, 특히 과학철학의 패러다임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종교적 문제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뉴턴시대까지만 해도 과학자들은 자신을 과학자라 부르기 보다는 자연철학자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들의 철학에는 기독교적 사상이 깊에 자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다윈의 진화론이 세상의 빛을 보는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다윈 이전의 과학들은 그것이 획기적이고, 설령 성경에 반하는 내용이 담겨있더라도 얼마든지 기독교적 교리로 환원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은 지적설계자 자체를 부정해 버리면서 신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p.57

신은 식물과 동물을 직접 설계하거나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권위 있는 로마 가톨릭의 한 성경 주석서에 표현된 바에 따르면, 신은 이들을 간접적으로 창조했으며,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한 것은 지구였다.


1990년 보이저1호가 찍어 전송한 지구의 모습


p.59

세계관

자연

전통기독교

상호적 존재

유기체

초기 기계론

상호적 존재

기계

계몽주의 이신론

창조만 행한 존재

유기체

낭만주의 이신론

창조만 행한 존재

유기체

낭만주의 무신론

존재하지 않음

유기체

유물론

존재하지 않음

기계


용불용설의 라마르크와 찰스다윈의 조부, 에라스무스 다윈은 낭만주의적 이신론자였다.



p.65

1844년,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는 생기론자의 일반적인 논지에 입각해, 화학자들이 살아있는 유기체에서 일어난 유기적 화학작용을 분석하고 통합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눈 하나, 나뭇잎 한 장도 만들어낼 수는 없을 거라는 주장을 펼쳤다. 공인된 물리력을 제외하고, "새로운 특성(유기체 안에서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 형태와 특성들)을 가진 새로운 형태 내에서 원소를 결합하는 한층 다른 유형의 유발인자(cause)가 존재한다."



유기체를 혹은 기계를 세부적으로 분석하며 전체를 이해하려고자 하는 노력은 오래된 학습의 전통이다. 이는 교육학에서도 어느 정도 공인된 논리로서 대부분의 교육학 교과서에 실리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환원주의적 오류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책에서도 예를 들고 있지만, 분자나 원자 수준에서 생명체를 분석하는 일은 컴퓨터에 붙어있는 실리콘을 분석하여 컴퓨터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언어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앞뒤의 맥락과 문장구조를 파악하여 의미를 이해하지, 낱자 또는 활자를 통해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Chapter 2. 에너지보존의 법칙은 존재하는가?

p.91

데카르트가 모든 물질과 운동의 본래적 근원이 신이라고 말하는 순간, 물질과 운동의 전체량은 불변일 수밖에 없었다. 신과 신의 창조 행위는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학과 종교가 완전한 대척점에 있다는 믿음은 오히려 근래에 등장하였다. 과학의 발전이 신앙적 믿음. 특히 기독교적 믿음의 허상을 드러내 주는 듯했다. 예컨대, 신의 피조물인 줄 알았던 기린의 목은 진화론으로 대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과학적 업적과 신앙적 믿음은 상호양립을 해온 사례가 적지 않게 나타난다.



p.94

결국 물질적 우주가 마침내 장엄한 시작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거대한 에너지를 비축했다가 한순간에 분출한 뒤, 서서히 내어줌으로써 현재의 상태로 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한순간에 수억 년 이전으로 쏜살같이 돌아갈 수 있는 현재의 과학은 "빛이 있으라!"고 하자 아무것도 없던 비초가 복사에너지의 바다로부터 모든 물질이 터져 나온 창세기의 순간을 눈으로 보는 듯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다시말해, 종교에 회의적인 사람들. 가령 무신론자라던지 열열한 반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교리 타파의 근거로 과학철학적 소산물들을 제시하지만, 이는 과학과 종교의 괴리를 이어주지 못한다. 즉, 하나의 이론이 무신론자에게는 신이 없다는 증거가 되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신이 있다는 증거가 되어 평행선만을 달리는 논쟁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Chapter 3. 자연법칙은 영원불변한 것인가?

p.120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자연의 법칙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예전에도 지금과 마찬가지였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것이 이론적 가설일 뿐 경험적 관찰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200~300년 간 지구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조사만을 기반으로 어떻게 이 법칙들이 어디서나 항상 같으며, 같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허블상수나 중력상수는 수 년에 걸쳐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매순간 변화는 하겠지만, 변화에 대한 가시적인 결과물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수 개월 또는 수년에 걸친 모습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 이론이 고정불변이라는 가설을 해치지는 못한다. 이 변화를 통제하는 고정불변의 법칙이 있을테지만, 그 법칙을 아직은 모르는 것 뿐이라고 생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과학적 성과물들은 그 상위의 법칙을 알아내왔고, 알아내고자 하고 있다. 그럼에도 위의 지문에서 처럼, 45억년 이상 되었다고 추정되는 지구를 고작 200~300년을 보고 귀납법적 접근을 확고부동하게 적용하기에는 어렵다. 다만, 인류의 한 세대를 30년으로 둘 때, 한 번 밝혀진 자연법칙은 꽤나 오랜 세대가 향유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정보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이야기다.


따라서, 자연법칙이 고정불변하지 않다는 가설이 참이라 하면. 하나. 법칙은 충분한 이용가치가 있다. 둘. 신적 존재를 부정할 만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의 고정불변성을 의심하는 과학철학자 보다는, 이를 믿거나, 암묵적 동의를 하는 과학자와 일반인이 월등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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