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달러구트 꿈 백화점 -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1
이미예 지음 / 팩토리나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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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언제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십니까?”


그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대화하듯 말을 건넸다.


“여러분을 가둬두는 것이 공간이든, 시간이든, 저와 같은 신체적 결함이든…. 부디 그것에 집중하지 마십시오. 다만 사는 동안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데만 집중하십시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해리가 난생처음 마법사들의 세계를 접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다이애건 앨리라는 거리에서 호그와트에 가기 전에 필요한 교과서와 망토와 지팡이 등을 사러 가는 장면인데, 그 장면을 읽으면서 느꼈던 '환상적인 것들에 눈이 돌아가는 느낌'을 이 책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도입부에서 느꼈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적이나 꿈을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주인공이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스토리와 캐릭터 갈등 등이 전반적으로 잔잔하고 소소하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게 되는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꿈이 산업과 문화가 되어 '달러구트 백화점'이라는 물리적 장소에서 생산과 소비되는 모습을 상세히 그려내어서 진짜로 그런 장소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신기한 소재에 꼼꼼하게 채워 넣은 세계관으로 살아 움직이는 세상을 만들어 냈다. 매력적인 판타지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그런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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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미래를 파는 상점 - SF 소설가가 그리는 미래과학 세상
곽재식 지음 / 다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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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시대에 필요한 모든 것을 판매합니다."

최근 동네에 새로 생긴 상점의 광고 문구였다.








《곽재식의 미래를 파는 상점》은 향후 50년 안에 상점에서 팔 법한 물건을 예측해 과학적 근거로 풀어낸 책이다. 가전, 식료품, 잡화 그리고 마지막 특별 코너에서는 우주 생활과 태양계 바깥 탐사를 다룬다.



바다의 해초에서 양질의 단백질을 뽑아 실제 고기와 똑같은 맛이 나게 만든 바다 들소 고기. 입고 다니며 언제든지 충전할 수 있는 보조 배터리 옷, 나노 기술로 바닷물을 정화하는 해수 정수기. 여름에는 열기를 막아주고 겨울에는 찬바람을 막아주는 녹색 건축 필수품 창문 필름. 종이처럼 가볍고 유연하게 휘어지기도 하는 초저가 디스플레이를 탑재한 초경량 노트북 등등.



미래 예언보다는 지금 우리가 개발하고 있는 과학기술이 미래를 어떻게 바꿔 놓을지 이야기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어려운 용어가 나온다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각 기술의 핵심과 작동 원리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3D 프린팅 기술이 어떤 것인지 핵심만을 전달하거나, 어떻게 동물의 아닌 생물의 몸에서 뽑은 단백질을 재료로 인공육을 만들 수 있는지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해 준다.




프린팅이란 컴퓨터로 쓴 글자나 그린 그림을 종이 위에 그대로 인쇄하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3D 프린팅이란, 컴퓨터로 설계해 놓은 어떤 모양을 덩어리 그대로 기계가 뿜어내도록 하는 기술이다.

56쪽.



지구의 모든 생물을 이루고 있는 단백질은 다들 스무 가지 정도의 아미노산이 그 재료다. 즉 아미노산들이 어떤 순서로 얼마나 조립되어 있느냐에 따라 각자 다른 단백질이 된다. 그 차이뿐이다. 세균의 몸을 이루는 단백질도, 꽃의 몸을 이루는 단백질도, 오징어의 몸을 이루는 단백질도, 나비의 몸을 이루는 단백질도 다 같은 아미노산으로 되어 있다. 다만 아미노산이 조립되는 순서와 길이만 다르다. 스무 가지 블록이 똑같이 쌓여 있는데, 어떤 어린이는 그 블록으로 자동차 모양을 만들었고, 어떤 어린이는 우주선 모양을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다.

73쪽.








SF 작가가 상상하는 근미래의 모습은 다양한 과학 기술 분야가 통합되어 신기술이 개발되고, 그것들이 또 모여서 인류가 직면한 큰 문제를 해결하는 데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는 곳이다. 기술의 통합과 보편화가 이루어져 값비싼 최신 기술들이 점점 일상생활로 파고든다. 여기에 자연환경과 소외된 계층을 생각하는 감수성이 더해진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도 좋지만 저렴한 전기 경운기는 식량난에 시달리는 지역을 구할 수 있다. 사람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 로봇도 좋지만 나무에서 과일을 따는 일을 하는 투박한 로봇은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적정기술이란, 그 기술이 사용되는 사회의 필요와 환경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기술을 말한다(49쪽)." 이렇게 "건강하고 안전해진 사회는 결국은 운영하는 데에 비용이 덜 드는 사회이고, 또 좋은 인재들이 마음 편하게 지내기 위해 모여드는 곳(185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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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여성 예술가들 (보급판)
파이돈 편집부.리베카 모릴 지음, 진주 K. 가드너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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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도록 도울 것이다.

15쪽






파이돈 출판사는 영국의 대표적인 예술 전문 출판사다. 고전, 미술, 건축, 사진, 디자인, 패션 등 예술 관련 대형 도감을 펴내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예술가들을 장르나 시대로 구분 짓지 않고 알파벳 이름순으로 소개하기 때문에 아무 곳이나 골라 펼쳐서 읽어도 된다. 한 작가당 하나의 작품과 짤막한 소개 글이 전부지만 500여 년간 활동한 2,500명의 예술가 중에서 주요 아티스트 400여 명과 그 대표작을 선정했기 때문에 심혈을 기울인 티가 난다. 편집부는 더 많은 예술가들을 책에 소개하지 못한 점을 자못 아쉬워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인다.



책에 소개된 작가들의 소개와 작품을 보고 호기심이 생기면 그것을 이정표 삼아 웹으로 예술 탐험을 나가기 좋다. 코로나 시대에 이보다 더 적절한 랜선 여행 방법이 또 있을까. 지금은 비록 직접 작품을 볼 순 없지만 그럼에도 화면 너머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며 현실로 손을 뻗어오는 작품들이 많다.



우리는 이 짧은 글이 그들의 예술을 떠올릴 수 있는 비망록이 되고, 그들의 예술을 깊이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거나 그 탐구를 돕는 출발점으로 쓰이기를 바란다. 나아가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여성들의 예술을 더 읽고, 더 보고, 더 나누게 되기를 희망한다. 15쪽.





인류 대다수가 시각을 주요 감각으로 쓰고 있는 걸 감안하면 예술 작품 감상은 보는 행위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관객이 작품을 관찰할 때, 그 시선은 한곳으로 모이기도 하고 분산되기도 하며 때로 작품 속 인물과 만나기도 한다.







그림 속 인물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은 전달이다. 시선의 대상을 향한 태도와 감정이 드러난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린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를 보면 시선이 얼마나 강력한 도구인지 알 수 있다. 젠틸린스키는 대부분의 중세 여성 화가들처럼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 후 자신의 작품세계를 갈고닦기 위해 아고스티노 타시의 작업실에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그에게 강간을 당하고 법정에 나가 그 사실을 증언했다. 오랜 사투 끝에 그녀는 승소했지만 그 과정에서 느꼈을 감정이 그림 속 유디트의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다. "분수처럼 튀는 피를 피해 고개를 돌리고 있지만 눈은 똑바로 장군을 응시한다.(150쪽)"




작품 속 인물이 관객을 마주 보는 것은 독백 혹은 대화의 전조다. 중세 시대 화가들의 자화상이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권위를 당당히 보여주는 것이다.





1928년 제작된 클로드 카운의 <자화상>(81쪽)을 보면 거울에 비쳐서 사진 속 인물이 둘이 되었다. 자서전 『부정 Disavowals』에서 카운은 "카드를 섞자. 남성인가? 여성인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중선은 언제 어느 때건 내게 가장 잘 맞는 성"이라고 말했는데, 이 작품이 그 말과 공명하는 것 같다.




누드화는 시선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주제다. 주체와 객체의 문제가 거론되기 때문이다. 책에 실린 누드화 중에 인상 깊은 작품은 제니 사빌의 <도면 PLAN>이다. 가까운 거리에서 인물을 아래에서 올려다본 모습으로 그려 하체가 더 커 보인다. 그림 속 여인은 관객을 내려다보고 있다. 제니 사빌은 신체 이미지의 "과잉을 겁내는" 사회(357)에 대해 말한다.






때로 본다는 것은 지독히 피곤한 행위다. 내가 추상 예술을 보면 편안함과 해방감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추상에는 내 시선을 받은 대상도, 나와 눈을 맞추는 대상도 없다. 내 시선은 이리저리 진동하면서 작품 곳곳에 부딪혀 튕겨나간다.







브리짓 라일리의 <흐름>(336쪽)에서 느껴지는 어지럼증은 실물에서도, 그것을 찍은 사진이 실린 책 속에서도, 작은 스마트폰 화면 안에서도 느껴진다. 어지럼증을 참고 계속 보고 있으면 그림 속 물결 모양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의 흐름을 방해하고, 관객의 의식을 흡수하는 작품이다.





에텔 아드난의 <세상의 무게> 연작 속에서 자연 풍경은 단순화된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움직임도 느려지게 된다. 추상화를 바라보면 평소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고 느껴진다. 우타 바르트의 <들판 #3>(51쪽)은 자동차와 도로를 초점이 흐리게 찍은 것인데 관객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작품이다.






이제 예술은 시선에 얽매이지 않는다. 예술가들은 장르, 주제, 소재를 끊임없이 융합하고 초월하면서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관객 참여 예술이나 설치 예술처럼 보는 행위를 넘어서는 작품들도 많다. 이들은 관객에게 직접 말을 하고 접촉을 한다.






관심 가는 작품이나 작가의 이름을 하나하나 검색하면서 발견한 것은 여성 예술가들은 장소와 시대를 불문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슷한 화풍, 재료, 지역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물며 끝없이 이어지는 연관 검색어로 매번 다른 디지털 풍경을 경험한다.



실험 정신과 저항 그리고 회복탄력성이 이들 예술가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교육을 거부당하고, 장르와 재료를 제한받고, 작품과 이름을 빼앗겼어도 그들은 항상 있었다. 중세부터 현대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고 앞으로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더욱 쉬워진다는 확신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여성성만을 다루지 않는다. 이 책은 페미니즘 예술에 관한 책이 아니며, '여성의 수난', '여성적 주제'에 관한 작품 모음집도 아니다. 젠더 이슈보다는 여성들이 재료, 기술, 형태, 주제 등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작품들을 실었다. 결국 이 책은 역사에서 소외된 예술가들을 몇 십 년 동안 연구해 온 대규모 작업의 기록이자 오늘날 전 세계에 걸쳐 꾸준히 창작 활동을 펼치는 여성 예술가들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8쪽.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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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루몽 1~3 세트 - 전3권
남영로 지음, 김풍기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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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름답게 부서지던 벽성의 달이여

자옥하 강물에서 솟아났구나

인간 세상에 귀양을 가니

인간의 봄은 어떠하신가








19세기 전반에 쓰인 남영로의 소설 『옥루몽』은 『구운몽』이래 '몽자소설'의 계보를 집대성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속세의 인연을 매듭짓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난 신선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약 1500쪽 분량이고 총 3권으로 나눠서 표지를 새로 단장하고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다.






1권 〈낙화의 연〉

선계의 문창성군이 인간 양창곡으로 태어난다. 양창곡이 벼슬길에 올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다섯 여인들과의 만남과 관계를 중심으로 그린다. 설레는 만남과 절절한 사연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첫 번째 책이다.





2권 〈혼탁의 장〉

오랑캐를 토벌하라는 천자의 명을 받아 또다시 전쟁터에 나가게 된 양창곡과 강남홍, 일지련 등장수들의 활약상을 크게 그린다. 양창곡이 집을 비운 사이, 세 부인 사이의 갈등도 동시에 그려진다. 천자를 등에 업고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탁당과 그에 맞서는 양창곡을 중심으로 구성된 청당 사이의 당파 갈등도 나온다. 남북으로 말을 달려 이름 그대로 혼탁한 세상에 각자의 수완으로 맞서는 주인공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책이다.





3권 〈춘몽의 결〉

역경을 이겨낸 주인공들이 먹고 마시며 교류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리는 모습을 한 폭 아름다운 그림 같은 묘사로 그려낸다. 주연 조연할 것 없이 행복한 결말을 매듭지어 주어서 결말 만족도가 높다. 한바탕 꿈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구나. "물속의 달이요 거울 속의 꽃이라 할 만했다(1권 48쪽)" 눈을 뜨니 홀로 현실에 남겨진 독자로서는 시원섭섭하다.




1840년대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옥루몽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설이었고 1910년대 이후에도 활자본 등 상업적으로 출판되어 대중성을 증명했다. 독자들은 강남홍과 벽성선의 이야기를 따로 떼어 『강남홍전』과 『벽성선전』으로 만들기도 했다.



작품에는 삼국지나 초한지 같은 중국 소설, 유명한 시와 노래, 역사 속 인물과 전설은 물론 불교, 유교, 도교, 음양오행과 주역 같은 당시 독자들에게 익숙했고 재미있는 요소가 총망라되어 들어가 있다. 부패한 과거 제도에 환멸을 느껴 은거하며 살았던 작가 남영로지만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배우고 알고 있는 모든 요소를 소설에 녹여내어 감질나고 흥미진진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가 강남홍이 적진에 잠입하기 전에 양창곡이 건넨 뜨거운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는 소설 삼국지에서 관우가 적장 화웅을 치러가면서 "이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다"라고 말했던 장면을 패러디한 것이다. 90년대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뮬란〉의 주인공 '화목련'이 언급되는 장면도 있다.




"군중에서는 자고로 여인을 꺼립니다. 제 부친께서 이미 군중에 계시니, 첩은 마땅히 본국으로 돌아가야 여자로서 행동거지에 마음을 놓을 듯 싶습니다."

홍혼탈이 웃으며 말했다.

"낭자의 말이 지나치군요. 옛날 목란은 아버지 대신 출전하여 만리 밖에서 종군했지만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낭자는 어때서 그 문제에 얽매입니까?"

1권 436쪽






옥루몽의 주인공들이 욕망이 가는 대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 같으나 그들은 유교 사회의 엄격한 울타리 안을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다. 양창곡은 가부장제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주인공이지만 때로 자기 목숨을 내바치면서 천자에게 따끔한 진언을 한다. 여기서 조선의 붕당 정치와 과거 제도에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이 드러난다. 작품의 배경은 명나라지만 판타지 소설이 으레 그렇게 쓰이듯이 그것은 그저 탈에 불과하다. 조선의 정신과 문화의식이 곳곳에 드러난다.



간관諫官은 조정의 귀와 눈입니다. 폐하께서 지금 간관을 엄하게 견책하시어 귀와 눈을 막으시니, 폐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폐하의 문제점을 들으시겠습니까?

2권 159쪽



남자 주인공 양창곡이 만나게 되는 여러 인재들 중에 강남홍, 벽성선, 일지련, 황소저, 윤소저는 양창곡과 부부 관계가 된다. 윤소저와 벽성선 은 가부장제 아래 여자의 됨됨이에 따라 행동하다가도 때로 지략과 용기로 위기를 헤쳐나가고 주인공의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강남홍이나 일지련은 일견 가부장제 제약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강남홍은 남장으로 쌍검을 차고 전쟁에서 명국을 승리로 이끌었고, 남만 축융왕의 딸로 처음 적으로 등장한 일지련은 쌍창을 쓰며 양창곡의 주요 조력자 중 하나다.



"명나라 최고의 장수이자 양창곡 원수가 평생 총애하는 여인(2권 400쪽)" 강남홍을 빼놓고는 《옥루몽》이야기를 할 수 없다. 이런 뛰어난 활약에 감복한 천자가 3군 통제사의 지위를 하사하려고 했을 때 강남홍은 남편 양창곡이 줄곧 주장했던 가부장제 관습을 대면서 극구 사양한다. 자신을 낮추다 못해 비하로까지 들리는 이런 태도가 당대엔 겸손과 미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신첩은 아녀자라, 변복을 하고 운남을 간 것도 남편을 위해서였고, 바람 먼지 가득한 전쟁터를 누빈 것도 남편을 따른 것입니다. 시대의 운수가 불행하고 나라에 일이 많아 여자의 행실로 규방을 지키지 못하고 폐하 안전을 지척에서 이처럼 자주 배알하니 진실로 부끄럽고 당돌한 일입니다. (…)

지금은 비록 남장을 했지만 일개 아녀자인 것을 폐하께서 환히 아시는 바이고, 세상 사람들 또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성스러운 조정에 어찌 어진 신하가 없겠으며, 중국에 어찌 인재가 없겠습니까? 하필이면 일개 아녀자를 장수 자리에 올려 삼군을 호령케 하시겠습니까? 이는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북쪽 오랑캐에게 적잖게 모욕을 당할 것입니다."

2권 265쪽



강남홍의 뛰어난 능력은 오직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쓰이며 남편을 향한 사랑과 복종 아래에 수렴된다. 이 부분에서만큼은《옥루몽》이 21세기 독자와 멀어지는 느낌이다.



만약 강남홍을 비롯한 여자 주인공들의 운명이 가부장제의 한계를 넘어섰다면 옥루몽은 시대를 앞서간 명작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21세기의 독자의 눈에는 울타리와 한계점으로 보이는 그것이 당대의 작가와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것으로 환상 소설에 개연성을 부여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입신양명하여 평생을 함께할 지기와 배우자를 얻어 관직에서 물러나 적적한 시골마을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안으로 자식의 도리, 배우자의 도리를 다하고, 밖으로 신하 된 도리를 행하는 것이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로망이자 판타지였고, 그것을 모두 이룬 주인공이 나오는 《옥루몽》의 장르를 굳이 따지자면 판타지 소설이다. 그러나 《옥루몽》을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는 순간 《옥루몽》이 아니게 된다는 생각을 한다. 신선놀음을 하는 꿈을 꾸고 깨어난 듯한 여운을 주는 작품이다.



​조선 시대에 쓰인 원조 웹소설 같은 부분이 많은데 항상 절묘한 부분에서 끊어서 다음 화가 궁금하게 만드는 작가의 절단 신공만 봐도 그렇다. 연인이 사랑의 결실을 맺고 결혼 이후에 행복한 삶을 세세하게 그려내는 여성향 로맨스 웹소설의 모습도 보이고, 남자 주인공이 승승장구하며 돈과 명예와 사랑 등 욕망하는 대상을 모두 얻는 점에선 남성향 웹소설의 모습도 보인다.



평생의 원수가 생명의 은인 되는가 하면, 악행을 행한 자가 잘못을 뉘우치고 개과천선하고, 한때 적으로 싸웠던 자들이 훗날 든든한 아군이 되는 점 등 조연들도 헛되이 쓰이지 않고 각자 역할을 다하며 주인공들과 인연을 맺으며 서사에 발자취를 남긴다.



주인공들이 모두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고 오래오래 행복한 삶을 누렸다고 암시하는 결말을 보면 몽자 계열 소설이 주는 모든 게 한낱 꿈이었다는 허무감 보다는 인간 세계에서 충실하게 살았다는 만족감이 더 컸다.



"신선이 어찌 특별한 사람이겠습니까? 명예와 이익 가득한 속세에서 득실을 근심하고, 바람 물결 사나운 괴로운 바다에서 안위를 무릅쓰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만약 우리의 오늘 모습을 본다면 또한 신선처럼 느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세상일에 마음을 쏟는 사람은 범인일 것이고 고상한 사람은 신선일 것이며, 분주한 사람은 속인일 것이고 편안하고 한가한 사람은 신선이겠지요. 화형과 나는 오늘 관직을 버리고 산속에서 마음껏 노닐고 있으니, 어찌 오늘 자개봉의 신선이 아니겠습니까?"

3권 241쪽



당대 조선인뿐만 아니라 20세기 독자에게 사랑을 받으며 구운몽의 뒤를 이어 몽자 계열 소설의 완성도를 끌어올려 자신의 입지를 굳건하다는 걸 보여주었던 옥루몽. 21세기 독자들에게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과연 시대를 관통하는 고전소설의 진가를 또다시 보여줄 것인가. 한 가지 진실은 ​옥루몽의 작가 남영로를 다시 무덤에서 되살려 동양 판타지 소설을 지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다는 점이다.


다 같은 청춘의 젊은 나이에 풀잎 끝의 이슬 같은 인생이 서로 시기 질투하다가, 날아드는 나방이 등불에 부딪침에 인간의 희로애락이 다 한바탕 꿈인 것이지요.

2권 526쪽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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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미터O
이준영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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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건투를 빈다, 최후의 인간."






이준영 작가의 SF 장편소설 《파라미터O》는 인류 멸종 위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방사능에 노출되어 더 이상 생산을 할 수 없게 된 인류는 개체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나마 남은 생존자들은 보호복 없이는 나갈 수 없는 사막 황무지로부터 몸을 피해 보호 시설 속에 틀어박혀 살아간다. 이 시설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조슈'가 주인공이다.



'조슈'는 몇 년 전 사고로 시설에서 추방당해 바깥세상을 전전하고 있는 엄마를 찾기 위해 조사를 하던 도중 자신을 '이브'라 칭하는 작은 로봇을 만나게 된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반전과 통찰로 가득한 이 작품은 내게 하나의 사고 실험으로 가는 초대장 같았다.





최후의 인류가 사는 보호 시설엔 생존에 필요한 시설 내 산소를 생성하는 인공 광합성 장치 '나무'와 사용자에게 강력한 쾌감을 선사하는 헬멧 '쾌감기' 가 있고 이전 세대 인류의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유전자가 보관된 '씨앗 탱크'가 있다. 이 씨앗 탱크를 보존하는 것이 남은 인류의 사명이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감옥'이다. 마치 가해자와 피해자가 반드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폭력으로 점철된 인류 역사의 뼈대를 보는 것 같았다. 피해자의 용서와 가해자의 뉘우침만이 둘 사이의 격리를 해제시킬 수 있다. 인류의 생존에는 폭력과 잔인성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따라옴을 강하게 긍정하는 동시에 그것이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을 '쾌감기'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상기시킨다.



사회로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 용서를 받아 '피해자'와 '가해자'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는 이 소규모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원칙 중 하나였지만 그것 때문에 영원히 감옥에서 썩을 수도 있었다.

258쪽.




'조슈'가 황무지에서 만난 '이브'는 다른 로봇들과 사뭇 달랐다. 생김새는 말할 것도 없고 작동 방식도 달랐다. 시설의 로봇들이 프로그램된 대로 청소나 식량 배급 같은 작업을 수행하는 반면, '이브'는 파라미터O에 입력된 값에 따라 행동한다. 파라미터O는 인간으로 치면 삶의 목적이다. 만약 기계종 처럼 삶의 목표가 순식간에 수정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이것은 삶의 목적에 숭고함과 고결함을 부여하는 관점과 상충된다.



소설 속 인간들은 재차 의문을 던진다. 어차피 기억해 주지도 못할 업적을 위해 삶을 바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이 질문은 파라미터O가 설정되지 않은 기계종이 사명이 없다면 자기 존재에 모순이 온다고 말하는 장면과 겹쳐지면서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그 사명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

"저희는 사명을 지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어떤 것도 사명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모순을 불러옵니다. 사명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225쪽.





'이브' 같은 기계종을 만든 수수께끼의 인물은 누구인가? '조슈'의 추적은 계속되고 그것은 인류의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어쩔 수없이 맞딱드리게 되는 근본적 질문과 이어진다. "어떻게 해야 자멸하지 않고 건강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238쪽) 인류 멸망 직전에서 시작한 이 소설에 응당 가장 어울리는 주제다.



지금까지 파라미터O를 '자율'로 설정한 모든 개체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기적이고 불안정하게 변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값이 그나마 최선이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들이 자멸하지 않고 건강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

238쪽.




그리고 만약 인류에게 희망이 없다면, 지구의 다음 주인은 누가 되어야 마땅한가? 작품 속 생존자들은 그렇게 물으며 기계종에게 인간의 조건을 시험하려 든다. 인류를 대신해서 지구를 물려받을 만한, 도구나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의 종種을 찾고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주체성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은 작중에서 재차 언급되는 부분이다.



단순히 도구로서 생활을 보조 했던 기계종들이 객체에서 주체가 되는 순간이 올까. 뛰어난 지능과 감성이 인공이라는 근거로 부정당해 왔었던 과거에서 벗어나 공식적으로 인류의 자손으로 인정받는 날이 올 것인가.



인류는 이미 한번 멸망했다. 다중 우주론을 믿는다면 인류에게 자멸이란 낯선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파라미터O라는 소재를 통해 작가가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인간 사회의 생태계는 SF 소설의 목적을 증명한다. 바로 사고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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