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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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하나를 잘 읽으려면 그 글을 따라가고, 행동하고, 느끼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실상 그 글을 쓰는 것만 빼고 다 해야 한다. 읽기는 작가의 정신과 능동적으로 협력하는 작업이다. 모두가 빠져들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133쪽.






2014년 내셔널 북 파운데이션 수상식 날이었다. 영국의 판타지 작가 닐 게이먼이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글을 쓰는 작가"라며 공로상 수상자를 소개했다. 어슐러 르 귄이 단상 위에 등장했다. 청중은 숨을 죽이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아마 적당히 감사의 말을 전하고 내려가겠지,라고 예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르 귄은 '적당히'나 '뻔한'이란 수식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작가였다.



당시 미국 출판업계 시장엔 잘 팔리는 아이디어를 섞어서 양산하라는 압박에 작가와 편집부가 흔들리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관계자 중에는 그런 방식을 주도하고 있는 주주와 기업가도 있었다. 그 앞에서 르 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본주의가 출판 예술의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방향을 경계하는 연설을 한 것이다.


그날 연설이 불러온 관심에 대해 르 귄은 이 책에 이렇게 적었다. "고무적이었다. 사람들은 정말로 책에 신경을 쓰고,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걱정한다는 사실이 말이다."(14쪽)



르 귄이 6개월간 준비한 6분이 채 안 되는 짧은 글인데 이 책에도 전문이 실려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르 귄은 종이책이 사라지는 '책의 죽음'보다, 자본주의에 의해 상상력이 이용당하는 것을 더 위협적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 우려가 현실이 되어 저작권을 둘러싼 분쟁과 작가들의 창작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 소식이 간간이 들려온다.




우리는 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고, 자본주의의 힘은 벗어날 수 없어 보이지만…… 그렇게 치면 왕들의 절대 권력도 그랬지요. 인간이 만들어 낸 권력이라면 인간이 저항하고 바꿀 수 있습니다. 그 저항과 변화는 예술에서 시작될 때가 많고, 그중에서도 우리의 예술, 말의 예술일 때가 많아요.

201쪽.






책에는 어슐러 르 귄이 잡지에 투고한 서평과 작가에 대한 글이 잔뜩 실려있다. 서평을 읽으면 낯선 책을 만날 수 있고, 익숙한 책도 다르게 보인다. 하물며 르 귄 같은 거장의 서평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좋아하는 작가들, 인상 깊게 읽은 책들에 대한 르 귄의 해석과 감상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작품이 언급되면 그 책을 다시 읽어보거나 독서 일지를 찾아보기도 했다.



《이중 도시》는 국내 유일하게 출간된 차이나 미에빌의 작품이다. 물리적으로 겹쳐져있는 두 도시와 서로를 못 본 척해야 하는 사람들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관계가 나오는 탐정 소설이다. 작년 독서 일지를 찾아보니 '소재는 마음에 들었지만 갈수록 실망스러웠다'라고 적혀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 르 귄이 남긴 차이나 미에빌의 다른 두 작품에 대한 평가가 너무나 좋았다. 앰버시타운과 세 번의 폭발 순간이 국내에 출간될 날이 올까? 아니면 어떻게든 찾아서 읽어야 할까.



이미 읽은 책들이 있다면 르 귄의 글을 읽는 재미는 배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책들, 예를 들어 절판되었거나 국내 미출간된 책들이 있다면 기대에 부풀어 탐색을 시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둠의 왼손》 40주년 서문에서 르 귄은 말했다. " 나는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에 변화가 일어나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그렇게 쓴 것은 당시의 변화 중 일부에 해당한다."



그녀가 내 나이였을 때 세상은 지금보다 더 병들어있었고 삐딱했다. 판타지와 SF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고, 여성 작가들도 소수였던 시대였다. 장르 문학이 리얼리즘 문학 보다 못하다고 평론가가 무시하고 학계가 고립시키던 시대였다. 글에서 느껴지는 고집, 강인함, 사려 깊음, 애정은 그런 시대의 변화와 함께한 80여 년간의 인생에서 나왔다.



버지니아 울프와 60, 70년대 여성 작가들이 어슐러 르 귄의 작가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르 귄은 판타지와 SF를 쓰는, 오래 쓰고 싶은 모두의 우상이다. 내게 어슐러 르 귄은 풍부한 감성과 세계관하면 떠오르는, 정치 · 사회 · 젠더 이슈에 관심이 많고, 무신론자이며, 고양이를 사랑하는 작가다. 무엇보다도 공명하는 작가다.



남겨둘 시간이 없다고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한번 어슐러 르 귄을 알게 되면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것이기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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