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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책으로 살고 있습니다 - 책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나이즈미 렌 지음, 최미혜 옮김 / 애플북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저자인 이나이즈미 렌 씨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부흥의 서점(復興の書店)>이라는 일본 원서를 통해서이다. 저자는 논픽션 작가로서 2011년 3월 11일 동일본지진으로 동북 지역이 초토화되고 몇 개월 후 그 지역의 서점 운영자들을 찾아 인터뷰하며 다시 서점을 일으키는 과정을 담은 논픽션인 <부흥의 서점(復興の書店)>을 썼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으나, 엄청난 자연 재해를 입은 분들이 "책은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생활필수품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가슴이 찡했다. 이 저자도 그 취재를 통해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이 책을 쓸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책을 쓰는 작가, 세계 각곳의 번역서를 소개하고 보급하는 가교 역할을 하는 에이전트, 작가가 쓴 글의 오류를 잡아내고 완성도를 높이는 그림자 같은 교정교열자,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서체 개발자, 책의 표지를 아름답게 만드는 북 디자이너, 책의 물성을 좌우하는 종이를 만드는 제지업자, 흰 종이에 비로소 글씨를 새김으로써 책의 형태를 만드는 인쇄업자(여기서는 활판인쇄), 독자의 손에 최종적으로 닿기 전, 책을 완성하는 제본업자 등 8가지 책을 만드는 데 깊이 관여하는 일을 소개한다.
한 부분 한 부분 얼마나 가슴 설레어하며 읽었는지 모른다. 각 영역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 책을 대하는 철학과 고집이 그대로 녹아있는 인터뷰 내용과 밀착하여 세심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저자의 스토리텔링이 어우러져 향기로운 책 향기를 그대로 자아낸다.
가장 소프트웨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쓰는 작가 대표로 <마녀 배달부 키키>의 저자 가도노 에이코 씨가 등장한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으로 봤던 <마녀 배달부 키키>의 원작 소설이 있는지도 몰랐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책이라는 매체를 좋아한다고 하시며 아이가 책을 좋아하고 또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분이다.
"하지만 일단 책이 재미있다고 생각되면 금방 좋아지고
무엇보다 다음에는 자기가 읽을 책을 스스로 고를 수 있게 되거든요.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스스로 고르는 행위는
생각하고 혼자서 깨닫고 행동하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자세 그 자체가 아닐까요?
그러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는 기쁨은
아이에겐 정말로 큰 의미가 있는 거예요." (동화작가 가도노 에이코 씨)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만 해도 출판사 영업사원들이 가가호호 다니며 방문영업을 했었다. 어려운 형편에 들여 주셨던 계몽사의 위인전, 한국전래동화, 디즈니 전집 등을 하나 하나 골라가며 읽었던 기쁨, 맘에 드는 책은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으며 곱씹었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고전을 읽으며 책 뒤의 전체 리스트를 보고 다음에는 뭘 읽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느꼈던 잔잔한 환희는 사춘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다. 지금도 역시 매일 쏟아져 나오는 신간들을 보며 어떤 책을 읽어볼까 고민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에 비견하는 기쁨이다. 그 책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교정/교열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프리랜서로 하는 일들 가운데 맞춤법, 띄어쓰기는 물론 내용의 정확성,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는 것, 영어 및 일어 원문과 대조하여 검수하는 일들을 하고 있으니 교정/교열자의 말이 깊이 다가왔다.
"지금 출판업계에서는 비생산적인 교열부문을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교열부야말로 출판사의 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이 있고 모든 사람이 글을 쓰게 되었기 때문에
그 사회적 의미는 더 커지고 있는 거 아닐까요?" (교열자 야히코 다카히고 씨)
이 분도 지적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프리랜서 외주 교열자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한다. 나도 그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을 감독, 관리하는 출판사의 담당자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책들을 보면 교정/교열에서 완성도가 판가름난다는 생각이 든다. '다다미의 먼지와 오자는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나온다'라고 이 책에도 나와 있는 만큼, 완벽이라는 것은 없다. 하지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의 완성도는 확실히 있는 것 같다.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중요한 것처럼 서체 또한 음성이니까요.
거기엔 밝은 음성도 있고 위엄 있는 음성도 있습니다." (서체 개발자 이토 마사키 씨)
한 권의 작품이 주는 인상은 저자나 편집자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장정, 종이, 글자의 간격 등 책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책은 비로소 하나의 작품으로 자립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글자의 형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책의 하드웨어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표지 디자인, 서체, 종이의 종류, 제본 형식 등 모든 것이 독자에겐 '독서'라는 귀중한 경험을 총체적으로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되는 것 같다. 독서라는 경험의 이미지, 느낌, 감성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종이책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전자책도 자주 이용하는 입장에서 가뜩이나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화면에 비치는 글씨가 맘에 들지 않으면 정말 읽기가 괴롭다. 다행히 전자책에는 서체뿐만 아니라, 글씨 크기까지 변경할 수 있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고 그 책과 가장 어울린달까, 내 맘에 가장 편안한 서체와 크기로 변경해 놓고 읽는다.
이 논픽션 저자의 문체가 참 좋다. <부흥의 서점>에서도 그랬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우려 하는 자세가 묻어나는 것 같다.
개인적인 취향을 저격한 이 책에 (애정에서 비롯한) 굳이 품게 된 세 가지 불만이 있다.
첫째는 책의 소프트웨어적인 부분 즉, 콘텐츠에 관한 일 중에서 편집자와 번역가에 대한 심층 취재가 있어주길 바랐다. 중개역인 에이전트와 교정/교열자에 대한 부분은 무척 좋았는데 책을 만드는 데 있어서 편집자의 중차대한 역할을 볼 때 실제 그 일을 하고 있는 베테랑의 음성이 궁금했고, 외서를 들여와서 자국에 보급하는 통로가 되는 번역가의 감상, 일에 대한 직업관, 자부심과 고충에 대해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둘째는 삽화나 사진 등 비주얼 이미지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 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해 주신 역자 분이 정말 요소요소에 적확한 주석을 추가해 주셨으나 독자가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근본적으로 역부족이다. 일반인으로서는 사전지식이 없는 제지 공정이나 인쇄 과정 등은 제아무리 구글 검색을 해도 한계가 있는 데다가 북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내용들에 대한 설명이 죽 나오는데 그나마 원어 검색을 할 수 있는 나는 일일이 구글이나 아마존 재팬 등에서 검색을 해 보면서 읽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있었으나 일반 국내 독자들은 어떤 책의 어떤 디자인을 말하는 것인지 알 방도가 없으니 그리 친절한 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셋째는 교정/교열 부분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 주셨으면 좋았을 것 같다. 일어 번역서에서 가장 틀리기 쉬운 부분은 단연 지명, 인명일 것이다. 열 쪽 정도 되는 분량에서 앞에서 나온 동일인이 분명한데 인명이 다른 것이다. 구어에서는 그냥 넘어가지만 문법상 틀린 표현인데 그대로 쓰여 있어서 그런 용법이 원래 있는데 내가 잘못 안 것인가 하는 마음에 국립국어원에 카톡으로 확인을 했다. 이 작품과 번역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다. (이 부분은 출판사 담당자 분께 이메일로 보내려고 한다.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독자의 예가 아니므로...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2쇄를 찍게 되면 그 때 반영하면 되는 것이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 한 권 한 권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많은 고민과 시도와 땀의 결정인지 모르겠다. 나의 아름다운 책들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