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시간의 법정
이가라시 리쓰토 지음, 천감재 옮김 / 시옷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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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유아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선과 악, 착한 자와 나쁜 자, 상과 벌, 즉, 권선징악 스토리를 좋아합니다.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으며,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존재인 인간 내면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의의 편, 슈퍼 히어로 같은 경찰, 변호사 등 정의의 사도들이 등장하는 스토리를 너무 좋아합니다. 그런데 국내에서 법정물은 그리 인기가 없다는 말을 언뜻 들었습니다. 

법정물의 신지평을 연 작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현직 변호사가 쓴 본격 법정물, 리걸 미스터리이자, 언제나 매력적인 요소인 타임 슬립의 콜라보입니다. 저자인 이가라시 리쓰토 작가는 <법정유희>로 메피스토상을 받았고 이 작품은 동명의 영화로 제작 중입니다. 메피스토상은 츠지무라 미즈키, 유키 하루오 등 현재 가장 핫한 일본 작가들의 등용문으로써 주목할 만한 상이지요.

[스포일러 없음]

이 작품의 주인공은 법정 서기관으로 일하는 우구이라는 20대 남성은 가족을 버리고 새 가정을 이룬 친아버지가 의붓딸 성추행 행위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처음에는 아버지의 결백을 믿지 않았지만, 우연히 발견한 사실 때문에 아버지가 무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재판이 끝나고 정리하고 나오다가 그는 타임 슬립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몇 번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아버지의 사건, 그리고 아버지의 의붓딸 린의 절도 사건, 과거 아버지가 일으킨 교통 사고 등 여러 사건이 등장하고, 우구이와 함께 또 한 명의 시간 이동자 재판관 가라스마의 타임 슬립과 그로 인해 바뀐 미래가 날실과 씨실로 엮여갑니다. 그리고 한계 있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죄를 판단하는 일의 무거움과 보람, 인간적 고뇌가 아주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타임슬립물은 크게 과거를 바꾸었더니 현재도 바뀐 경우와 과거를 아무리 바꾸어도 현재는 바뀌지 않는 경우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작품은 전자이고요, 게다가 시간 이동자가 우구이 한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건에 엮인 재판관 가라스마까지 두 사람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현재도 바뀌어가죠. 두 사람의 캐릭터가 대단히 매력 있습니다. 이토록 진지하고 성실하고 올바른 법의 심판자라면 정말 믿음직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구이의 아버지의 회색 같은 캐릭터도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어 좋았습니다. 타임슬립물 중에서는 단행본 만화책, 애니메이션, 드라마로까지 제작된 수작 <나만이 없는 거리>를 특히 좋아했는데, 앞으로는 이 작품과 함께 <뒤틀린 시간의 법정>을 수작으로 꼽을 것 같습니다.

머리가 좋아야 타임슬립물도 쓰겠다 싶은 게 우구이와 가라스마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과거에서의 행적이 변화를 일으키니 두 사람의 관계성, 사건 재판의 전개 등 꽤나 머리가 아픈데 이 어려운 타임슬립물을 쓰신 저자님, 이 복잡한 작품을 옮기신 역자님 정말 존경합니다.

영롱한 무지갯빛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다운 법정의 모습,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감각적으로 묘사한 앞표지도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뒤틀린 시간의 법정'이라는 타이틀도 정말 작명 센스 최고입니다. 책의 내용을 세 단어로 가장 적확하고 매력적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장마 속에 자신 있게 추천드리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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