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땅의 야수들 (리커버 특별판)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6월
평점 :
일시품절



9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간 30대 여성 작가가 쓴 대한민국 근대사의 이야기가 무척 궁금해서 읽어본 책이었습니다. 열흘 전, 이틀 만에 책을 독파했지만, 서평을 금방 써버리고 넘겨버리고 싶지 않아 열흘을 품고 있다가 익혀서 적어봅니다.

이 작품은 외국에 거주하며 역사의 격랑 속에 만주, 일본 등지로 흩어진 한민족이 이야기를 담았다는 관점에서 보면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가 궁금하여 한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되 외국에 거주하는 일종의 외부인의 시선으로 쓴 한국인의 이야기를 꽤 여러 권 읽어본 것 같습니다. <파친코>는 물론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하얀 국화>, 뉴베리상을 수상한 아동문학인 <When you trap a tiger>, 그리고 넓게는 한국인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인 <H 마트에서 울다> 등입니다. 모든 책이 다 각각의 방식으로 독특하고 빼어나고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용감한 거지. (429쪽)

이 책은 역사의 격랑을 각자의 방식으로 용감하게 살다간 그 시대의 인간 군상극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립운동에 참여하셨다는 조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년여의 자료 조사, 그리고 작가적 상상력을 아교로 붙여서 짜낸 정말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미시적으로 줌인하여 각 사람 하나하나의 캐릭터를 섬세하게 묘사하며 모든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거시적으로 줌아웃하여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과 그속에서 각자가 택한 선택들, 그리고 그 결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분이 한 대학교에서 강연한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입체적인 인물의 성격이 한국 문학의 매력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본인도 그 매력을 이 작품에서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등장인물 어느 한 사람도 철저하게 선하거나 악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도 멸시당했을 기생이라는 신분의 평양의 은실과 경성의 단이는 독립운동가들의 가장 큰 자금줄 중 하나입니다. 11살 나이에 가난한 집의 입이라도 하나 덜겠다는 마음으로 기생이 되기로 결심하는 옥희와 옥희의 가장 친한 친구 연화는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습니다. 그들 나름의 세상 사는 지혜로 기생이 되지만 어린아이답고, 그 시절에도 생동감 넘치는 그들의 청춘과 야망은 반짝반짝 빛납니다. 절세의 미모를 타고났지만, 일본인 소좌의 겁탈로 삶의 생기를 잃어가는 듯 같았던 월향은 그 태어난 아이를 바라보며 그리고 그 이전의 도도함과 거만함을 내려놓고 땅에 깊이 발을 딛고 견실하게 살아가며 그녀 나름대로 학문을 익히고 일하는 여성이 되고, 그녀를 사랑하는 미국 영사를 따라 미국에서 가장 안온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한편, 남자들의 인생 역시 기구합니다. 지주의 아들로 일본에서 같이 수학했던 성수와 명보는 한국에 돌아와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성수는 요즘 태어났으면 그저 처세에 밝았을 비즈니스맨일지도 모르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친일 성향이 아주 강한 남자이며 가부장적이고 여성을 도구나 대상으로만 봅니다. 한편, 성수만큼 부자지만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며 사회주의 노선의 독립운동에 헌신한 명보는 상속받은 재산까지 다 털어 독립운동을 합니다. 성수와 명보 둘 다 가정을 가졌지만, 기생 단이에게 한순간이었다고 해도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지요. 그리고 범 사냥꾼의 아들, 정호는 떠밀려온 경성에서도 타고난 뚝심과 배포, 싸움 실력으로 곧 떠돌이 아이들의 두목이 되고 우연히 마주친 기생 옥희를 평생 사랑합니다. 그리고 명보를 만나며 명보가 품은 대의를 이해할 지력은 안 되지만, 스승으로 삼은 명보를 존경하며 그의 심복으로 독립운동에 발을 담급니다.

인간은 늘 거짓말을 하고, 서로를 속이며, 자신의 친구와 가족과 나라를 배신했다. 그렇게 배신을 하며 달라붙은 상대를 또 배신하였으며, 자신의 얄팍한 안위를 위해서는 그 어떤 신의도 없었다. 모든 한국인은 일본식으로 성명을 바꾸라는 창씨개명령이 내렸을 때, 나라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그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름을 헌신짝처럼 버리기 위해 헐레벌떡 줄을 섰다. 자신이 타고난 이름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그 어떤 신념도 명예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고 정호는 생각했다. (436쪽)

정호의 시선 끝에 늘 옥희가 있는데 옥희의 시선 끝에는 쇠락한 안동 양반 집안 출신의 한철이 있습니다. 한철은 매우 총명하고 눈곱만큼이나마 양반의 긍지를 품고 있지만, 가난은 그를 좀먹습니다. 주경야독으로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인력거를 끌며 망한 집의 가장 노릇을 합니다. 영화배우가 된 옥희를 만나고 둘은 서로에게 반합니다. 옥희 덕분에 대학에도 진학하면서 신분에 점점 격차가 생깁니다. 게다가 양반의 자존심 때문에 한철은 옥희를 멀리합니다. 옥희는 운명처럼 그를 놓아주지요.

작가의 예리한 인간 관찰에 놀랐던 부분은 보이는 증거로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친일파를 찾아내서 처단하는 과정에서 평생 친일을 했고, 일본의 패전 이후에도 한몫 크게 잡아 큰 재벌 기업을 이룬 성수는 단이에게 잘 보이려고 딱 한 번 자신의 출판사의 인쇄기를 돌려 독립선언문을 인쇄했다는 증거가 남아 친일파 처단을 면하고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반면, 스승인 명보를 도와 젊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정호는 운명의 장난처럼 정호의 아버지가 수십 년 전, 겨울 산에서 구해준 일본인 소좌가 준 징표로 인해 빨갱이이자 친일파로 몰립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증거도 징표도 모두 진실과 사실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 예리하게 보여주는 거죠.

현대를 사는 우리는 편안하게 앉아 역사를 논하며 친일파와 빨갱이를 가르고 그 당시를 살았다면 모두가 애국만 했을 것처럼 가볍게 비판하고 판단하지만, 저는 항상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당시에 살았다면 나는 어떤 군상에 속할까? 그리고 엄격하고 잔혹한 반상 문화, 계급 사회 속에서 당시에 사회주의 이념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느껴졌을지, 그리고 얼마나 청년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그 이념대로 살려고 했을지 오늘의 시각으로 무 자르듯 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양반이었지만 신 지식을 배웠던 순수한 그들이 모든 걸 버리고 그 이념을 추종하려 했을 겁니다. 물론 우리나라를 갈갈이 찢어놓고 반으로 뚝 베어놓은 열강의 개입으로 인해 사회주의는 악, 민주주의는 선이라는 공식이 성립해버렸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봤을 때 사회주의는 일종의 시대정신이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배본능, 권력에 대한 갈망, 이기심이 그 이념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죠. 본질처럼 이뤄질 수는 없었으니까요. 좀 더 신중하고 좀 더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각을 길러야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해봅니다.

호랑이만큼은 정말이지 놓치고 싶지 않아. 일본에는 그처럼 사나운 맹수가 없거든. 영토로 따지면 우리가 훨씬 더 큰 나라인데도 말이야. 이 작은 땅에서 어떻게 그리고 거대한 야수들이 번성할 수 있었는지 신비로울 따름이야. (513쪽)

일제가 말살하여 멸종시켜버린 호랑이, 그리고 현대도 멸종 위기종인 아무르 표범은 그 시대를 각자의 방식으로 용감하게 살아온 한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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