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나를 만나다 - 나와 함께, 나답게, 나를 위해
김건숙 지음 / 바이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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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를 '빛살무늬 님'이라고 굳이 부른다. 발음하기 어려운 한글 음절을 한자리에 모아둔 듯이 부르기 힘들지만, 굳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우리 특유의 거리감을 유지하고 싶어서이다.


'언니'라는 친밀함의 호칭으로 품으로 확 달려드는 듯한 거리감도 내겐 익숙지 않고, '선생님', '작가님'이라는 격식 있고 '양팔 벌리기'만큼의 소원한 거리도 아닌, 소중함과 친밀함과 존경을 담은 '빛살무늬 님'이면 충분적절한 것 같다.


이 책에서 빛살무늬 님은 자아를 찾는 여행을 4가지 챕터로 구성하였다.


chapter 1 제주에서 '나'와 첫 대면하다

chapter 2 숲에서 나를 만나다

chapter 3 오후 세 시에 나를 만나다

chapter 4 내 몸에서 나를 만나다


chapter 1 제주에서 '나'와 첫 대면하다

<구덩이>라는 단 한 권의 그림책을 들고 '제주'라는 저자의 구덩이로 들어간다. 제주도의 '이글루'라는 숙소로 가서 책을 읽고 걷고 또 걷는 시간을 통해 누군가의 딸, 한 남자의 아내, 두 딸의 엄마이라는 페르소나를 벗고 헐벗은, 진정한 날것의 자아를 마주한다.


chapter 2 숲에서 나를 만나다

저자가 자연을 사랑하고 걷기를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전 지구를 강타하고 두려움을 드리우며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 대유행 속에서 저자는 또 하나의 자아 찾기를 숲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사시사철,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모습을 보며 마음을 비우는 동시에 꽉꽉 채운다.


몸의 자극으로 얻는 즐거움도 다른 것들과 견줄 만큼 크다는 것을 숲을 다니면서 알았다. 심장까지 부풀어져 오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즐거움을 더해주는 것이 있으니 자연의 변화이다. 날이 따스해지면서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작은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삐죽 나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허리를 구부려 눈을 맞추다 보면 생명의 경외감에 젖는다.

"잊지 마세요, 새순을 내는 여린 나무들이 있다는 것도요." (68쪽)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대단한 명예, 부, 지위도 아닐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이 자살하지 않고 옥중에서 버틸 힘을 주었던 것이 손바닥만 한 햇볕이었으며, 장영희 교수님이 모든 유학 과정을 끝내고 어서 가족 품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릴 때 논문을 도둑맞아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준 것도 햇살이었다. 알고 있었던 이야기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찡한 이야기다. 그 햇살을 얼마나 바라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특히 숲에서 나뭇잎들 사이로 뻗어오는 햇살은 그 비현실적인 신비감에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저자도 아마 그런 시간들을 산에서 가졌으리라.


작은 새순들, 꽃마리처럼 낮은 곳에 피어서 고개를 굳이 숙이고 무릎을 꿇어야 눈을 맞출 수 있는 작은 풀꽃들을 경외감을 품고 바라보는 저자, 집게를 사서 쓰레기를 줍고 다니는 저자의 인간적이고 애정 넘치는 모습에는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진지하고 숙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읽다가 박장대소를 터뜨리게 한 에피소드들이 있었으니 바로 트로트 가수 '덕질'에 관한 것들이었다. 설마 빛살무늬 님이 이렇게 늦바람(?)이 나셔서 한창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트로트 가수 중 장민호라는 아이돌 출신 가수를 엄청나게 덕질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다 바람이다. 늦바람이 났는데 저자는 새바람을 불러일으킨다고 했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기도 하고, 또 삶의 활력이 되니 얼마나 보기 좋은가 싶었다. 조금씩 여기저기 아픈 데가 생기고, 인상 찌뿌릴 일이 더 많아질 것 같은 중년의 삶에 이런 삶도 괜찮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나도 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80년대 후반, 혜성같이 등장했던 '이상은'을 격하게 사랑했었고, 고등학생 때는 고3 되기 전 마지막 콘서트라고 생각하고 '김종서' 콘서트에 갔었던 것을 끝으로 덕질은 멈췄다. 그런데, 최근 다시 피아니스트 '조성진' 덕질을 시작했다. 물론 나야 게으르고 열정이 떨어지는 사람이라 어디까지나 유튜브 덕질이다. 하지만, 덕질이 그야말로 삶의 활력을 주긴 한다. 조성진 씨가 인터뷰에서 '신라면을 '알 덴테'로 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한 것을 우울할 때마다 되새기며 혼자 웃는다. '꼬들꼬들' vs '알 덴테'이다. 장민호 씨를 생각하며 편지를 쓰고, 그림책까지 만드는 그 열정에는 내 어찌 당하랴마는 덕질의 기쁨이라는 것은 공감한다.


chapter 3 오후 세 시에 나를 만나다


오후 세 시에는 저자가 가정의 서재에서 어려서부터 깊이 읽었던 책들과 삶을 돌아보며 적은 글들이다. 저자처럼 이제는 중년이 된 반려견 밀키의 모습에 자발적으로 얽매이는 삶을 선택한 저자의 모습이 코끝이 시큰했다.


이렇게 조종당하고 통제를 당해도 나는 기꺼이 밀키에게 얽매여 사는 삶을 선택한다. 자발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사랑하니까. (180쪽)


반려견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속내까지는 몰랐다. 이것이 책의 매력이 아닐까? 책은 저자와의 대화라고들 하는데, 만나서 대화하는 것보다 더 깊은 우물 속 같은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렌즈 같다. 어려서 읽었던 삐삐 롱스타킹 이야기, 그림책을 만들고 싶은 열망, 그림책을 읽는 마음 등을 잔잔하게 이야기해준다.


chapter 4 내 몸에서 나를 만나다


저자는 50대 중반, 이제는 조금 삶의 속도를 늦추고 몸과 대화하고 몸을 돌보는 삶을 발견한 것 같다. 그것은 그만큼 치열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누려도 되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중학교 때 잠 안 오는 약을 먹으며 공부할 정도의 열정, 판소리, 그림책, 사진 등을 향한 못 말리는 열심, 하루 1권의 책을 1년, 즉 365일 읽으며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왔던 삶의 속도를 살짝 늦추고 몸과 대화하며 몸과 동행하며 숲을 걸으며 노년의 삶을 향해 페이스 조절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빈둥대는 시간, 그리고 자나 깨나 죽음 생각, 나이듦에 대한 인정과 긍정, 맨발로 걷기 등 50대는 물론, 50대를 바라보고 있는 나같은 40대도 대리 체험하며 미리 인생의 중후반을 준비하는 시간을 엿볼 수 있었다.


나 역시 걷는 것을 정말 좋아하여 '걷기 예찬'으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는데 제주를 걷고, 숲을 걷고, 책 속을 걷고, 몸 속을 걸으며 이렇게 멋진 한 권의 책을 내신 빛살무늬 님께 박수를 보낸다.


동시대를 살아가며 나이와 차이를 초월한 친구가 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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