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모네이드 할머니
현이랑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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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일시금 수 억에, 월정액이 천만 원이 넘는, 마을로 위장한 최고급 요양병원이 있다. 그러나 입주자들은 모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치매 환자들이다. 그곳은 직원들도 마을 주민으로 차려입고 어느 곳에서나 좋은 말로 하면 입주자들을 돌보고 나쁜 말로 하면 감시하고 있다.

비교적 정신이 말짱한 치매 초기의 괴팍한 '레모네이드' 할머니, 그리고 요양병원 싱글맘 의사의 여섯 살 아들 '꼬마'가 콤비를 이룬다. 겉에서 보기에는 그야말로 호젓하고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마을 속에는 대한민국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어느날, 이 평화로운 마을에 사건이 터졌다. 쓰레기장에서 사산아의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지루해 죽겠는 레모네이드 할머니는 옳다거니 하고 사건 조사에 나선다. 일찍 철이 든 똘똘한 여섯 살 꼬마가 조수 역할을 톡톡히 한다. 폭력 남편으로 인해 이혼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이 마을의 페이 닥터로 온 꼬마의 엄마 서이수 선생도 내심 그 사건이 궁금했던 터라 은근히 협조적이다.

꼬마와 할머니의 주거니받거니 하는 대화 속에 콕콕 찌르는 인생의 진리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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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어떤 아저씨들은 내가 웃지도 않는다고 싸가지 없다고 하던데요

​할매: 그건 사람들이 옛날부터 늙으면 하는 소리다. 신경 쓰지 마라.(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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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뭐 흔한 이야기죠. 요즘엔 많이들 이혼하잖아요. 뉴스에서도 그랬어요.

할매: 남들에겐 흔한 비극이라도 자기가 당하면 서러워지는 게 인간이지.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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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네 이름도 말하지 마. 알면 나중에 헤어질 때 슬퍼져. 넌 그냥 '꼬마'로 있으면 돼. (60쪽)

별다른 능력도 없고 말을 더듬으며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는 이름없는 아르바이트 청년은 모르핀과 일회용 주사기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요양병원에서 쫓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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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고시원 방을 보고 관짝이 아니냐고들 하지만 나는 비행기 퍼스트석이라고 생각한다. 비행기 퍼스트 석에 타 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많이 봤다. 구조도 내가 쓰는 방과 비슷했다. 침대에 책상, 작은 창문. 내게는 거기다 작은 샤워실까지 있다. 다만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지 모를 뿐이다.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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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자식 인생에 별로 도움이 안 돼. 자기가 하는 일이 다 자식을 위해서 하는 거라고 말은 하지만 자신을 위한 거짓말이거나 실제로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222쪽)

세상 사람 좋을 것 같은 원장이 실은 비둘기를 훈련시켜 마약 밀매를 하고 돈을 빼돌리고, 그와 공범인 정치인, 병원장 등 사회 고위층은 요양병원에 은밀히 마약 파티를 할 곳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고급 와인과 마약으로 파티를 한다.

사산아 시신 사건을 쫓던 레모네이드 할머니와 꼬마에게 누군가 은밀히 도서관의 장부를 조사해 보라는 쪽지를 건네준다. 그리고, 그 사건은 묘하게 원장의 중학생 딸과 연결되어 간다. 원장의 중학생 딸, 최고 모범생이다가 한 번의 실수로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데, 사랑받지 못한 이 아이가 사건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리고, 암 말기였던 레모네이드 할머니는 꼬마 곁에서 꼬마의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는다. 이 요양병원의 전모가 밝혀져 줄줄이 체포되어 가고, 레모네이드 할머니의 유언이 실현되는 장면이 TV에 나온다.

그건 바로 할머니의 전 재산을 동전으로 바꾸어 서울역 광장에서 뿌리는 것인데, 그 일은 이름없이 사라졌던 아르바이트 청년이 맡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소설은 아니었다.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처럼 본격적인 스파이물이나 미스터리를 예측했었는데 영아 시신 사건에서부터 왠지 불온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부유층 자녀들과 연예인들의 마약 관련 사건은 너무나 흔해서 '그들이 사는 세상'이 그런 것인지, 우리 아이들도 휘말릴 수 있을 만큼 마약이라는 것이 저변으로 확대된 것인지 이미 기성세대가 된 나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불안했다. 이 책에서도 조직적으로 마약 밀매매가 행해지고 불법 자금을 축적하고, 빼돌리고 이중 장부를 기록하는 등 그런 일이 버젓히 일어나고 있었다.

돈은 있지만, 사랑은 없는 부모가 결국은 아픈 아이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중학생 여자아이의 깊은 좌절이 사건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사 이래 가장 가난한 세대라는 요즘 20대의 억울함과 원통함도 느껴졌다.

그러나, 희망이 없지는 않았다. 소년원에 들어간 소녀가 만들어 보낸 빵, 그리고, 꼬마와 꼬마의 엄마 서이수 의사, 죽은 레모네이드 할머니의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비서가 일말의 양심과 희망을 보여주었다.

Start small. 나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작지만, 그런 작은 희미한 불꽃이 모인다면, 변화의 잔물결이 일지 않을까?

현대를 사는 인간들의 씁쓸한 군상극이었지만, 역시 레모네이드 같은 달콤한 끝맛도 남는 책이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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