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오아물 루 그림,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어려서 읽었을 때는 단순하고 서정적인 삽화와 어딘가 미스테리한 구절들이 좋았다. 군데군데 깊이 다가오는 그 또래 수준이 이해할 수 있는 감성을 자극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여중, 여고를 나왔기 때문에 여우와의 만남에서는 소중한 단짝 친구와의 의미 깊은 우정을 대입하며 공감하며 읽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구절은 뭔지 모르지만 멋있게 느껴졌다.

어른이 되어 읽은 『어린 왕자』는 더 풍성한 정서적 충족감과 통찰력을 선사해주었다.

"어떤 날에는 해가 지는 것을 마흔네 번이나 보았어요."

그리고 잠시 후에 너는 이렇게 덧붙였지.

"아저씨도 알겠지만······ 마음이 몹시 슬플 때는 노을이 너무 멋져요."

"노을을 마흔네 번이나 본 날은 무척 슬픈 날이었구나?"

내가 물었지만, 어린 왕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38쪽)

노을을 보며 슬픔을 삼킨 경험이 생긴 어른인 나에게 무언가 목구멍에서 울컥 하는 느낌으로 다가왔던 구절이었다. 비교적 평탄하게, 무난하게 20대, 30대, 그리고 40대의 반 정도까지 살아온 내게도 마흔 네 번이나 노을을 보며 슬프고 외로웠던 경험이 있기에 이 구절이 내게 위로를 전해주었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줄 몰랐어요. 그 꽃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했어야 하는 건데······. 그 꽃은 나를 향기로 감싸주고 빛으로 밝혀주었어요. 그러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어요. 어쭙잖게 꾀는 부려도 바탕은 상냥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하는 건데······. 꽃들은 하는 짓이 엉뚱해서 종잡을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너무 어려서, 그 꽃을 사랑한다는 걸 미처 몰랐어요." (48쪽)

그리고 까다롭고 거만하고 손이 많이 가는 어린 왕자의 장미꽃은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는 것만을 믿지 말고 행동 속에 드러나는 진실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사랑의 표현이 서툰 내 아이들과 내 부모님. 나 역시 과도하게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사람이라 보이고 들리는 대로 판단해 버리는 우를 범할 때가 허다하게 많다. 매 순간 그렇다. 그들이 나의 하나뿐인 장미꽃, 내가 관계를 맺고 유리 덮개를 씌워준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깊이 깊이 마음 속에 아로새겨야겠다.

임금, 허영꾼, 술꾼, 장사꾼, 점등원, 노신사를 만나며 어린 왕자는 일곱 번째 별 지구에 와서 파일럿을 만났다. 어릴 적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어린 왕자가 만난 여섯 사람 속에서 내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중용'이라는 이름으로 타협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 순수와 순진을 간직하면서도 세상에서 고생하며 살지 않을 정도로는 재리에도 밝으면 좋겠고 남을 위한 이타적 행위를 하면서도 내 것은 견고한 담 속에 간직하길 원한다. 나는 남이 가진 것으로 함부로 판단하려 하지 않지만, 남이 나를 그런 잣대로 판단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남에게 무시당하거나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을 만큼은 권위와 명예도 있길 바란다. 세상에서 살면서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갖추어놓고 적절히 바꿔 써 가면서 능숙하게 살아온 것 같다.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의 내면을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겠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에요." (123쪽)

끝없는 사막 같은 생애 속에 우물을 꿈꾸며 줄곧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고 그 생애 속에 장미꽃, 그리고 사막 여우를 만나는 행운이,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 삶의 보람이 찾아오길 바라며 새해를 시작한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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