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커버
아마릴리스 폭스 지음, 최지원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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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이 있다면 바로 저자 아마릴리스 폭스의 삶이 아닐까 싶다. 20대 초반에 CIA 요원으로 발탁되어 본부에서 공작팀을 지원하는 분석팀을 거쳐 공작팀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예술품 사업가라는 위장 신분으로 가장 비밀스럽고 위험한 작전을 펼치는 비공식 요원으로까지 활약했던 1980년생 여성의 회고록이다. 왜 출생연도를 굳이 언급했는가 하면 이 비범한 삶을 살았던 주인공과 동시대인으로서 그때 나는 무엇을 했는지 하나하나 생각해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아래 여동생이 1980년생이라서 더욱 실감이 났다.

아는 역자님이 회고록 장르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나 역시 생생하고 촘촘한 사실의 기록인 회고록을 좋아한다. 자서전이라 해도 좋고 논픽션이라 해도 좋다. 이 저자는 필력 또한 보통이 아니다. 사건의 묘사와 함께 실제로 모든 일을 겪었던 당사자이기에 가능한 심리적인 갈등과 철학까지 허구의 문학이라면 이렇게 사실적으로 기록해낼 수 없었을 것 같다. 사실 너무 자세한 묘사와 설명으로 인해 이슈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스파이물, 특히 언더커버 즉, 잠입이나 변장이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에 열광하는 타입이고 게다가 여성으로서 뛰어난 지력과 신체 능력, 배포까지 겸비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스파이의 비일상적인 삶을 엿보고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의 성장배경, 그리고 대학 합격 후 아마도 Gap year를 버마에서 보내면서 저자의 사상을 형성했던 남다른 경험들, 그리고 옥스포드와 조지타운 대학 대학원을 거쳐 CIA 요원으로 발탁되어 훈련을 받으며 어엿한 첩보요원으로 거듭나는 모습이 너무나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멋지고 대단했다. 그러나 그녀가 한 인간으로서, 한 여성으로서, 더 나아가 한 엄마로서 고뇌하고 얻게 된 신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테러와 파괴의 의외의 원인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관한 매우 통찰력 있는 일화가 있었다. 테러의 원인이 거창한 정치외교적, 혹은 군사적 이유가 아니라 아끼는 펜을 빼았겼거나 소중한 식구에게 선물받은 것을 짓밟히는 등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것, 자신의 인격을 무시당하고 짓밟힌다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개인적인 삶에서나 국가적인 운명에 있어서나 깊이 새겨볼 만 한 부분이라고 생각됐다. 피와 살이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 이성과 신념과 함께 감정을 가진 다면적인 존재에 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매일의 삶 속에서 누군가를 경멸하거나 얕보거나 소중한 것을 짓밟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며 숙연해졌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세계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해주는 건 이렇게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였다. (329쪽)

우리가 취직 걱정을 하고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리는 일상의 삶을 살아갈 때 누군가는 핵전쟁을 막고 핵테러를 막기 위해 생명을 거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희생으로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를 누릴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평소와 그리 다를 것 없었던 2001년 9월 11일, 그 누구도 상상도 하지 못할 테러가 세계의 경제 중심지 뉴욕에서 발생하여 전 세계를 큰 충격에 빠뜨렸던 것을 기억한다. 그 전날과 그리 다를 바 없었던 날이었는데 한순간 세계는 통곡에 빠졌다. 어제의 평화가 오늘의 평화를 보장하지도 않고, 오늘의 평화가 내일의 평화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어제, 오늘의 평화 역시 한순간에 빼앗길 수 있었는데 누군가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 지켜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테러범들은 테러를 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더없이 소중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가슴 찡한 인간애와 모성의 위대함

공작원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취약성'을 파고든다. 즉, 경제적 어려움, 가족의 질병 등 제안을 거절할 수 없는 약한 부분을 가진 사람을 타겟으로 하지만 저자는 그보다 더 '고매하고 휴머니즘적인 인간의 본질적인 선의'를 믿으며 그런 '초자아(superego)'적 측면에서 호소한다. 진심은 통한다고 믿는다.

예술품 사업가라는 위장 신분으로 상하이에서 거주할 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중국인 도우미 '아이' 씨와도 위장 생활 중에 드러낸 진심이 마주쳐 공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테러를 꾀하는 집단의 리더를 만나서 대면했을 때는 그의 4개월 된 자녀가 천식을 앓고 있는 듯하자 정향유를 내밀며 부모 대 부모로 진심을 보여준다. 그 상대 역시 그 마음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정말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장면 중 하나이다.

정말 거의 머신 수준에 가까웠던 주인공은 딸 조이의 임신, 출산, 육아와 함께 첩보 작전을 병행했다. 그리고 조이와 같은 아이들이 위협받지 않고 그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으로 딸을 떼어놓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작전을 수행하러 떠난다. 같은 엄마로서 가슴이 찡했다.

*

CIA를 떠난 후 그녀는 저널리스트이자 방송인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게다가 <캡틴 마블>의 히로인 브리 라슨 주연의 영화로 제작된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된다.

부디 우리의 특별한 일 없는 아름다운 일상이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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