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 소용돌이 안내소
아오야마 미치코 지음, 전화영 옮김 / 직선과곡선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6년씩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의 소용돌이. 인연과 인생의 이야기.

몇 번을 목구멍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는지 모른다.

여섯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연작 단편집인데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다음 에피소드의 조연이 되기도 하여 그 고리를 찾아보는 것이 묘한 재미이다. 그것이 인생 아닐까? 우리 연자 언니 노래처럼 각자 한 편의 소설을 쓰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데, 어느 장면에서는 내가 주인공이기도 하고, 또 어느 장면에서는 주인공의 친구, 혹은 지나가는 사람 1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얽히고설키는 인생이 정답지 않은가?

일본인들이 가지는 연호에 대한 감각을 한국인인 내가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왕이 바뀔 때마다 시대가 바뀌는 것이다. 작년에 아키히토 일왕이 퇴위하고 아들에게 일왕을 물려주면서 연호가 헤이세이에서 레이와로 바뀌었다. 하나의 매듭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88년도 아재 개그라고 하듯이 그들은 쇼와 같은 개그라고 한다. 우리가 x세대, y세대 운운하듯이 그들은 1989년에 시작된 헤이세이 세대는 이전의 쇼와 시대와는 다른 신세대의 느낌이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2019년 즉, 작년 헤이세이가 끝난 시점에서 6년씩 거슬러 올라가며 여섯 개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쿄 근교의 바닷마을 가마쿠라의 상점가의 한 구석에서 시공간이 뒤틀리며 '소용돌이 안내소'라는 곳에 이르는 여섯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각각의 고민을 안고 있다. 직장에 있어서의 진로와 꿈, 자녀와의 문제, 결혼을 앞둔 여성의 망설임, 교우 관계에서의 어려움, 진정 하고 싶은 것과 '참 잘했어요' 사이에서 망설이는 중년남성, 32년 전에 자신의 마음과 달리 세상의 통념에 따라 내친 인연을 만난 고서점 주인 등등.

이들은 소용돌이 안내소에서 쌍둥이 노신사와 살아있는 암모나이트 화석을 만나며 신비한 엷은 푸른색의 항아리 속에서 자신들에게 힌트가 될 물건들을 하나씩 만난다. 그것은 각 단편의 제목이기도 하다.

모기향, 가마, 김초밥, 높은음자리표, 하나마루, 소프트아이스크림...

어떻게 이렇게 누에가 실을 풀어내듯 희한하게 스토리를 전개하는지 정말 대단한 작가이다. 이 작가의 데뷔작부터 단행본은 모두 읽어봤는데 정말 내 마음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그냥 나는 흘러서 도착한 곳에서 그때그때의 최선이 일으켜 줄 기적을 믿었어. 예상치 못한 전개로 다음 문이 열리는 게 재미있거든. 그건 회사원이든 프리랜서든 마찬가지야. 그때그때의 최선의 결과,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거지.

<가마쿠라 소용돌이 안내소> 59쪽

나도 그러하다. 내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때그때 만나는 사람, 그때그때 만나는 일... 그러나 최선을 다했고 진심으로 대해왔다. 원통스러울 정도로 분하고 화나는 만남도 없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신념이랄까, 신조랄까... 나는 내가 품은 대로 최선을 다해왔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길이 열리기도 했고 소중한 인연을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안목도 생긴 것 같다.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 취해야 할 것과 걸러야 할 것을 보는 차분한 눈이 생긴 것 같다.

내 품에서 볼이 통통한 신고가 헤헷 웃었다. 그래, 이 얼굴. 이 아이가 이렇게 웃는 거보다 더 황홀한 일이 또 있을까?

나는 지금 신고 곁에 있어 주지 않았다.

뒤에서 몰고 앞에서 억지로 잡아당기고 위에서 지시를 내렸다.

<가마쿠라 소용돌이 안내소> 120쪽

눈물이 찔끔 났다. 사람이란 망각의 존재이다. 특히 기억력이 좋지 않고 현재에 몰입하는 나같은 사람은 과거가 보이지 않는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나는 기록을 남기지 않고 정말 바람처럼 살아가길 원했다. 그래서 마구 세세히 기록을 하다가도 죄다 한순간 찢어 처분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역사를 사진으로든 문자로든 기록해두고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곁에 있어 주고 싶다.


예전에 비디오를 볼 때는 '되감기' 기능이 있었다. 우리가 때로는 인생을 되감기 해봐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우리를 오늘까지 있게 한 역사를 그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오늘 내 앞에 있는 책 한 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 그 시작은 나무 한 그루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피차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이지만 부부가 처음 만났을 때의 시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름다운 책으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윤기가 도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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