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회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6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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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겐덴이라는 중견기업을 무대로 내부 고발, 조직적 은폐, 기업 문화에 대한 인간군상극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다양한 조직원들의 시각으로 몇 챕터가 진행되어서 초반에는 다소 산만한 느낌을 주지만 중반 이후로는 확고하게 스토리라인이 머리 속에 정리되면서 책장이 날개를 단 듯 넘어간다.

최고 실적을 자랑하는 영업부의 에이스 사카도가 말도 안 되는 명목으로 심각한 징계를 받게 되자 사내에서 많은 사람이 의구심을 품는다. 사내에서 서로 견제하고 짓밟으려는 알력 다툼으로 의외의 인물과 부서에서 이 일을 파고들고 진상을 밝혀낸다. 처음에는 어느 회사에나 있을 만큼의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밝혀진 사건의 규모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정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아찔한 리콜 은폐 사건이었다.

군상극의 매력은 각 사람의 다양한 면면을 보는 것이다. 한자와 나오키처럼 확실하게 마음 붙일 호감 있는 캐릭터가 없었다. 다 하나같이 자기 한몸 건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사건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에 의해 파헤쳐지는 것이 매력이라면 매력일까?

이 책에서 '체질'이라고 했던 부분이 내게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소설 이상의 묵직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즉, 체질이란, 조직원 개인의 문제가 아닌 조직 구조의 문제, 기업 문화를 의미한다고 보면 딱 맞다. 극중에서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것은 사카도 개인이었지만 십 수년 전에 다른 인물이 스케일은 다르지만 같은 종류의 문제를 일으켰었다. 그것은 분명히 그 문제를 일으키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단순히 말하면 영업 실적의 압박일 뿐이지만 영업 담당자에게는 정말로 피를 말리는 과도한 할당량인 것이다. 그리고 기업 문화는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그 기업 문화는 각 기업의 가장 큰 핵심역량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가장 취약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CEO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데 오너 사장이 아닌 고용된 전문경영인이라면 오너의 의지를 무시하고 추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재미도 재미이지만 이렇게 내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어서 이케이도 준의 책이 좋다. 내가 몸담았던 금융회사에서의 일을 많이 생각나게 했다. 특히 내가 많이 했던 말이 그 '체질'이며, '기업 문화'였다. 아마 주주 및 투자자를 상대하며 그 기업의 최대 강점이라고 설명했던 핵심 용어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기업의 이익을 구성하는 최대 강점 중 하나가 "낮은 원가"였다. 그리고 제조업이 아닌 금융업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대부분 인건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기업 전반에 배어 있는 짠돌이 정신은 한순간에 축적된 것도 아니었고 또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체질인 것이다. 그래서 빡센 업무 강도로 업계의 사관학교라고도 불렸는데 여기를 그만두고 경쟁사로 옮겨 신입사원으로 새로 시작해도 나중에는 금전적으로 이득이라고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도 많이 했다.

이 책에서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한 여직원의 이야기가 끼어 있어서 처음에는 빠지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도 했는데 굳이 끼워놓은 작가의 의도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내 불륜과 실연으로 홧김에 퇴사를 하려고 하면서도 뭔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신선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구태의연한 기업 문화, 즉 체질을 바꿀 수 있는 신선한 인물의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20대 사무직 여직원 한 명이었지만 이 군상극 안에 넣음으로써 작지만 조직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음으로써 숨통을 트이게 하는 희망이 되는 인물을 상징한 게 아닐까 혼자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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