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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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자체로서는 무척 유려하고 섬세하고 빼어난 작품인데 그리 맘 편히 읽을 수 없었던 책이었다. 의자 등에 기대어 보기보다는 의자 끝에 걸터앉아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해서 읽어야 했던 것 같다.

마고 뵐크라는 여성이 95세까지 숨기고 지냈다가 비밀을 털어놓은 실화를 기반으로 문학으로 완성시킨 책이다. 리얼리티가 주는 강력한 힘이 대단했다. 전쟁 가해자였던 독일의 여성의 관점으로 그 당시의 상황과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인 동시에 사람이 태어나 먹고 살며 웃고 울며,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사람의 소박한 일상의 모습이 함께 담겨져 있다는 것이 이 책이 이토록 어필한 이유인 것 같다. 46개국 출간 및 5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이탈리아 8개 주요 문학상 수상작품이며 크리스티 코멘치니 감독의 영화제작이 결정되었다.

로자라는 여성의 시선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베를린에서 나고 자란 로자는 포탄으로 인해 어머니를 잃고 결혼한 지 1년만에 남편은 나라에 충성한다며 전장으로 향했다. 더 이상 베를린에 있을 이유가 없어져 남편 그레고어의 집으로 간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히틀러의 시식가가 된다. 10여명의 여성들과 함께 히틀러가 먹을 음식을 미리 먹고 1시간 동안 음식에 독이 들어있는지 여부를 몸으로 증명해내는 것이다. 생사가 왔다갔다 하지만 이들은 일반인들보다 높은 시급을 받는다. 본인이 원치 않았더라도 히틀러의 안녕을 위해 일하고 있는 셈이다. 처음의 긴장은 곧 일상 속에 녹아들고 물론 음식을 대할 때마다 두려움은 있지만 전쟁통에 맛볼 수 없는 진수성찬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일상과 관성 속에서 그리고 전쟁이라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이들의 욕망과 정서적 불안은 사납게 요동친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돌아올 것이라던 로자의 남편 그레고어는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편지만을 남기고 돌아오지 않는다. 로자는 시식가들을 관리하는 유부남 장교와 육체적 관계에 빠지게 된다. 시부모님께 언제 들킬까 하는 불안 속에서도 불장난을 이어간다. 그리고 시식가 여성들 중 묘하게 겉도는 듯하면서도 로자와 마음이 통했던 엘프리데가 숨어든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그녀는 추방당하고 그 충격으로 로자는 심한 마음의 방황을 겪게 된다. 패색이 짙어지는 상황에서 그녀는 내연의 관계에 있던 장교 치글러의 도움으로 도주하게 된다.

로자와 치글러가 사랑을 나눈 후 씁쓸하게 나누던 유대인 여성들의 검열과 무자비한 폭행과 죽음의 이야기에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누군가는 인격을 살해당하고 실제 목숨도 빼앗기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사랑을 나눈 후에 무심히 나누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악인 중 하나일 히틀러가 민감한 대장의 소유자였다는 것, 독살당할까 봐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것이 왜 이렇게 가소롭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너무 인간적이어서, 나와 똑같이 살과 뼈와 피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너무 익숙하지만 실제 인물로 느껴지지 않고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 같은 느낌이었는데 육체와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을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방법으로 인종청소한 사람이 고작 나같이 민감한 대장의 소유자였다는 것이 한심스럽다고나 할까?

전쟁도 악도 일상이 되고 관성이 되어 버리면 참 평범하게 인간은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오히려 비정상적이고 비일상적인 상황이기에 더 몸부림치며 일상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식욕과 성욕이 소용돌이치는 것일까? 불안하고 두렵고 현실을 잊고 싶기에 욕망 속으로 도피하는 것일까?

이들이 만약 히틀러라는 악에 저항한다면 어떤 형태로 저항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을 소개하는 사람마다 언급하는 유대인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정말 형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히틀러를 위해 시식을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우리는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 역사가 평가하는 대로 독일 나치스의 패악하고 비인도적인 행위를 비난하지만 그 시대, 그 순간을 살아가는 수많은 일반인들은 어떻게 그 시대를 살아가야 했을까?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책을 읽는 내내 직면해야 했기에 괴로웠다.

참 많은 생각이 든다. 일제시대를 겪은 우리나라이기에 더 그런 것 같다. 일제 36년, 초기에 독립운동했던 투사들이 변절하고 친일로 돌아섰다고 우리는 간단하게 말하지만 36년이라는 세월은 철 모르는 4살짜리 아이가 40살이 되는 분량의 세월이다. 욕할 수 있을까? 일상이 되고 관성에 빠져들면 영원히 그렇게 굳어진다고 당연히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기에 친일인사들, 독립인사들의 공과 과를 구분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일 것이다. 역시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이뤄낸 우리 민족의 기상이 눈물겹도록 대단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시대를 읽고 살아가야 할지를 성찰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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