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꿀벌과 나
메러디스 메이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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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역서의 타이틀 작명 센스에 기립 박수를 보내고 싶다. 곧잘 서양와 동양의 사고구조의 차이를 보여주는 그림 보고 분류하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심리 테스트 같은 것을 본 적이 있다. 가령, 토끼, 돼지, 당근이 있을 경우, 서양인의 경우 동물이라는 분류로 토끼와 돼지를 묶지만, 동양인은 토끼가 당근을 먹으니 토끼와 당근을 묶는다는 그런 식이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동양인은 관계를 중심으로 서양인은 개념을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한 가지 유의미한 사실 하나는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원서의 제목이 The Honey Bus이다. 저자가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중요한 장소인 벌통을 놓았던 오래된 버스이다. 그런데 역서의 제목은 『할아버지와 꿀벌과 나』이다. 이 제목 안에 책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할아버지와 꿀벌과 나의 관계성... 너무나 핵심적이고 너무나 정곡을 찌르는 이 책 자체를 보여주는 제목이고 아마 나한테 제목을 지으라고 했어도 이 제목 외에는 안 떠올랐을 것 같다.

서론이 길었는데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 책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리얼리티를 띤 소설이었으면 좋겠는데 이건 너무 믿고 싶지 않은 허구성을 띤 실화였다. 가족이 무엇인지, 신뢰가 무엇인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우리는 어렸을 때 우리 세계의 전부인 부모로부터 배우게 된다. 설령, 바람과 달리, 그 양자가 분리되었다고 할지라도 양쪽으로부터 사랑을 배우게 되는데, 저자인 메러디스와 두 살 어린 남동생 매슈는 그야말로 버려진 신세가 된다.

메러디스가 5살, 매슈가 3살 때 아빠를 로드 아일랜드에 남겨두고 엄마와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캘리포니아로 오게 된다. 그리고 깊은 우울증에 빠져 침대에서 나오지도 않는 엄마와 다 성장한 딸은 애지중지 갓난아기 대하듯 하며 손주들은 짐짝처럼 취급하는 할머니, 멀리 있는 그리운 아빠. 메러디스와 매슈는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이다. 오로지 비빌 언덕은 양봉가인 할아버지 하나뿐이다. 할아버지는 엄마와도 혈연으로 연결되지 않은 할머니의 재혼남이므로 할아버지에게 메러디스와 매슈는 의붓 손주이지만 할아버지는 벌들을 돌보며 세상을 통달한 것인지, 원래부터 우주와 같은 넓이의 마음을 가진 것인지 어린 손주들을 품어준다.

"할아버지의 삶은 뒤엉킨 가족사로 복잡하지도 않았고

우리를 받아들여줄 여유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와 시간을 보내길 기대하는 어른이었고,

우리에게 새로운 것들을 가르쳐주는 일을 즐겼으며,

우리의 의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었다.

할아버지는 부모가 마땅히 해야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해주는 분이었다." (207쪽)

이제나저제나 달라지려나,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애늙은이처럼 자라나지만 어느 순간, 메러디스는 포기되지 않는 그 마음을 못내 포기하고 만다. 7년이 지나고 5살이던 메러디스가 중학교에 갈 꼬마 숙녀가 되도록 엄마는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심해진다. 갖고 싶었지만 갖지 못했던 상류층에 대한 동경, 자신에 대한 집착 등으로 점점 흉해질 뿐이다.

그럼에도 메러디스와 매슈는 쑥쑥 크고 자신의 세계를 찾아가며 성장한다. 여전히 할아버지와 꿀벌과 함께말이다. 그리고 신기하기 그지없는 조화로운 꿀벌들의 세계에서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다.

"꽃가루를 날라주는 벌이 없으면

슈퍼마켓의 농산물 코너에 있는 대부분의 상품이 사라질 거라고

할아버지는 설명했다. ...

대자연은 모든 계획을 촘촘하게 짜놓았기 때문에

한 가닥을 잡아당겨 풀었다가는 전체가 흐트러질 수도 있었다.

우리 대부분이 벌을 보면 무서워서 도망가기 바쁘지만

사실 이 작은 곤충은 우리 모두를 이어주는,

끈끈한 지구의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291쪽)

할아버지의 애정어린, 그리고 시기적절한 충고로 메러디스는 미래에 대해 꿈꾸고, 엄마에게서 탈출할 대학 진학에 대해서도 상상한다. 할머니의 놀라운 정보력과 계획력과 실행력에 힘입어 메러디스는 거의 전액에 가까운 장학금 지원을 받으며 대학에 가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작가 (Writer) 겸 양봉가 (beekeeper)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저자 검색을 해 보았더니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쓴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계셨다.

 

https://meredithamay.net/

 

(출처 : https://meredithamay.net/bio/)

 

쓰라린 가족 해체의 아픔을 알기에 더 깊이 있고 진정성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것인지 퓰리처 상같은 저널리스트로서 최고 영예의 상들도 수상한다.

그리고, 거친 세상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느라 멀어졌던 꿀벌들로부터 소환을 받는다. 파킨슨병에 걸리고 이제 노쇠하여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할아버지가 꿀벌들을 부탁하신 것이다. 참 엉뚱한 저자는 자신의 일터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사옥 옥상에 벌통을 갖다 놓고 이름하여 '도시 양봉'을 시작한다. '도시 농부'라는 말을 들어봤어도 도시 양봉이라니 동료들이 기함했을 것도 충분히 상상이 된다.

상처입은 가냘픈 어린 새같았던 5살 소녀가 인생의 거친 파도를 헤치며 성장한 승리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만큼 '생태환경'에 대한 경종을 울려주는 면도 강조하고 싶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꿀벌의 개체 수 감소에 관해 무엇을 알까? 나 역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는데 꿀벌의 방향감각을 교란시키는 농약의 사용이든, 어떤 다른 원인이든 현저히 개체 수가 줄고 있다고 한다. 꿀벌이 살아남지 못하는데 그 인간의 선택의 결과가 인간에게는 과연 유익할 것인가? 땅을 파괴하고 작물을 파괴하고 꿀벌을 파괴하는 것은 인간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여왕벌을 비롯하여 각자 맡은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따라 우주와도 같은 조화로운 봉군의 질서를 유지하며 함께 살아가는 꿀벌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충실하게 역할을 이행하며 살아가는 꿀벌들처럼 우리의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한 권의 책이 기획, 번역, 편집, 마케팅, 디자인 등 각 역할을 맡은 꿀벌들의 합작품이자 작은 우주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내 손 안에서 묵직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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