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아서
에바 피규어 지음, 에바 알머슨 그림, 박세형 옮김 / 본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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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글이 함께 하는 힐링 에세이.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글이 가슴 속 깊이 콕콕 박힌다.
글쓴이인 에바 피규어도 육아를 경험하고 있는 엄마인가 보다.

새로운 인생

비행기는 다행히도 추락하지 않았고 너는 낯선 세상에 도착한다.
택시가 노란색이거나 운하를 길로 이용하거나
2월에 반팔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곳.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너는 마치 모국어처럼 알아듣거나
거의 알아듣지 못하거나 아예 알아듣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거리와 사람과 집과 햇살이 있다.

너는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찢어버릴 수도 있다.
눈에 띄지 않게 낯선 사람들 틈에 섞일 수도 있다.
그동안의 삶을 내던져 버리고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다.
빚도 없고 조만간 한번 보자고 하는 친구도 없고
끝내지 못한 대화도 없는 삶.

하지만 너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네게는 자식이 있고 얽혀 있는 인간관계가 있고 책임져야 할 일들이 있다.
이루어질 가망이 없기에 오히려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혼자만의 생각,
모든 걸 버리고 훌쩍 떠나는 상상, 미지의 목적지로 향하는 편도 항공권.
그것이 바로 자유일지도 모른다.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휴~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런 생각 수백 번도 더 했던 것 같지만
결론은 지금 있는 자리가 내가 있을 자리라는 확신.
하지만 상상의 나래를 펴고 훨훨 날아 갔다오는 건 내 자유.

출산 전, 회사 다닐 때는 1년에 한 번 정도씩 나를 위한 선물로
일본에 2박 3일 다녀오곤 했는데,
육아를 핑계로 작년에 무려 9년만에 도쿄에 갔었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니 이렇게 가까운 곳이었구나, 실감했다.
막히는 고속도로로 시집 가는 것보다 가까웠다.
머릿속으로 얼마나 그려보고 또 그려보고...
어떤 노래 가사처럼 그리워하다 미워하다 지워버렸지, 뭐.
내가 거닐던 거리가 있었고, 나에게 다정했던 사람이 있었고,
가을의 햇살과 밤에 내리는 가을비가 있었다.

하지만 책 속에서 나는 전 세계를 활보하고 다녔다.
책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 책이 없었으면 못 견뎠을 시간들이 있었다
지금 역시 나는 날마다 새로운 세상을 얻는다.



거울과 너

너를 보고 있으면 네가 보인다. 수많은 그녀가 보인다.

어릴 때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느끼고 홀로 겉돈다는 것을 알았던 그녀.
제발 쉬는 시간이 끝나길 기도하며 학교 화장실에 처박혔던 그녀.
긴 머리도 짧은 머리도 다 맘에 들지 않았던 그녀.
책과 함께 있으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그녀.
'용맹정진' 또는 '절차탁마' 같은 사자성어를 수집하던 그녀.
일회용 콘택트렌즈를 사용하던 그녀. 안경으로 귀를 꼭꼭 숨기는 그녀.
걸핏하면 우는 그녀. 너무 겁에 질려서 울지도 못하는 그녀.
남들에게 뒤쳐질까 봐 불안해하는 그녀. 가끔은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그녀.
섣부르게 마음을 주었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그녀. 혼자서도 척척 잘해내는 그녀.

기억의 상자에 비밀을 간직하는 그녀. 시치미를 뗄 줄 모르는 그녀.
일상적으로 만연한 사회적 편견에 괴로워하는 그녀.
남모르게 무덤까지 가져갈 어떤 일들 때문에 조금 후회하는 그녀.
거짓말이라고는 할 줄도 모르고 하기도 싫은 그녀. 이제는 더 이상 길어질 코도 없다.
전화를 거는 것보다 514개의 메시지를 보내는 게 더 편한 그녀.
누런 이가 보일까 봐 입을 닫은 채 웃는 그녀. 상투적이지 않은 농담을 들을 때만
누렇게 변색된 치아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활짝 웃는 그녀.
숫기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규모 모임에서는 온갖 수다를 떠는 그녀.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만 있다면 돈을 갖다 바칠 수도 있는 그녀.
생각하려고 글을 쓰는 그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건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고 말하고 싶은 그녀.
마침내 사람들이 진정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게 된 그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알아보는 그녀.



어쩜, 나랑 똑같네.

섣불리 마음 주고 후회하고, 한없이 정이 넘치는 것 같다가도,
혼자 뭐든 잘하는 나.
전화 거는 것도, 전화가 오는 것도 살짝 공포스러운 나.
메시지는 514개 아니라 51400개라도 보낼 수 있는 나.
숫기 없어 보이지만 한편 수다스러운 나.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는 나.
내가 너무나 미워서 마구 미워하다가
그런 내가 너무 안쓰러워서 혼자 훌쩍이는 나.
참 수많은 '나'가 내 안에 있다.



그림책은 작은 미술관이라고 애정 이웃 빛살무늬 님이 그러셨는데,
정말 작은 미술관을 만났다.

인쇄지도 고급스럽고 잘은 모르지만 프린팅도 무척 잘된 것 같다.
슬플 때마다 펴봐야지.

오월의 감성을 몇 배나 더 촉촉히 적셔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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