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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로 온 시 너에게 보낸다 - 나민애가 만난 토요일의 시
나민애 지음, 김수진 그림 / 밥북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시를 음미하기보다는 시에 대해 '공부'하여 시험 보는 데 익숙한 세대라서인지(어느 세대인들 안 그럴까마는...) 시를 보면 마음으로 스며들고 다가오는 게 아니라, 이건 무엇에 대한 비유인지, 주제는 무엇인지, 내가 몰라서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부담감이 확 올라온다. 그래서 피했던 것 같다. 직관적으로 따뜻하게 다가오는 이해인 수녀님이나 용혜원 목사님, 나태주 시인 등의 시는 마음의 더듬이를 곤두세우지 않아도 읽을 수 있어서 좋아하기도 했고 편지 쓸 때 적어서 보내기도 했다.
밥북에서 나온 나민애 문학평론가의 시평집이 나온다기에 참고서 옆에 두고 든든하게 시를 읽으며 배워보고 싶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나. 현대시 연구자에게 한 수 배워서 더 깊은 시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었다.
아, 이 책은 그 이상이다. 나의 기대 이상이다.
내가 고른 초콜릿도 좋지만 포장된 초콜릿 상자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생각하며 하나씩 골라먹는 초콜릿은 더 좋다. 평론가가 엄선한 인생과 자연, 사랑과 한에 대한 몇 십 년간의 명시들이 이 속에 있다. 어느 페이지를 열어서 읽어도 감동이 있다. 그 감동을 해설이 더해준다. 이건 해설이라고 할 수 없다. 해설의 경지를 넘어선 '시 에세이'이다.
시를 읽으며 울 수 있는 나. 아직 내가 살아있나 보다. 아직 내 감성과 영혼이 살아있나 보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구상, 우음 2장 中)
우스개소리 반, 진담 반으로 '꽃길만 걸으세요.'라고들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는 꽃으로 길을 깔아주고 싶은 마음... 누구나 힘든 짐이 있다. 이 자리가 도무지 가시방석같은 사람이 어디 한둘 이랴. 하지만 이 자리가 꽃자리인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느니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우리의 인품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 다가왔다. 이 시가...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나태주, 시 中)
마음에 반짝 불이 들어옵니다. 시로 인해...
어떻게 하면 나도 지구 한 모퉁이를 더 좋은 곳으로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갈까 생각해 본다. 아무래도 책 같다. 좋은 책을 나눠보고 좋은 책 이야기를 하고 좋은 책을 소개하고...
부호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살다가 천형이라 불리는 나병을 앓게 되어 세상의 천대를 받았던, 문둥이 시인으로 알려진 한하운 시인, 장동건, 원빈 저리가라 할 정도의 멋쟁이이자 낭만주의자였지만 소박하고 진실한 내면의 소유자였던 박인환 시인, 평생의 반려인 아내를 잃고 보는 곳이 모두 텅 비어있으며 봄이 다 지나가도록 꽃 한 송이 못 봤다는 시를 읊은 김광섭 시인 등...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거나 이름 정도만 알고 있거나 대표작 한 두 작품만 알고 있던 시인들의 성장배경이나 일화 등을 소개해 주니 시인이 더욱 피부로 다가온다. 그 시가 더욱 심장을 파고든다.
시 에세이라고 부르고 싶다. 시와 함께 읽는 수필이라고 할까?
시인과 시, 그리고 사람들을 향한 애정과 애틋함이 담긴 시어가 얼마나 아름답고 다정한지 모른다. 그 자체가 하나의 문학작품이다.
돈도 안 되는 시 때문에 술을 마시고 우는 시인 아버지... 고기가 먹고 싶은데 예쁜 에나멜 구두를 사다 주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시를 공부한 어린 평론가... 그 시를 이해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공부했다는 어여쁘고 대견한 마음의 어린 평론가의 모습이 보인다.
돈이 안 되는 것을 사랑하고 돈이 안 되는 것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겐 너무나 사랑스럽다. 너무나 어여쁘다. 그런 사람들은 추운 겨울을 위해 식량을 모아두는 대신, 햇살과 색깔과 언어를 양식으로 저장해 둔 나의 프레드릭들이다. 결국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돈이 안 되는 것들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의 언어와 시 속에 담긴 햇살을 나도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