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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진도 좋고
하라다 마하 지음, 김완 옮김 / 인디페이퍼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긴장은 내가 할 테니, ○○은 열심히 하기만 해."
고3 막바지 수능이 끝나고 1, 2, 3군 지망대학에 3번의 본고사가 남았을 때 단짝이었던 친구가 해주었던 말이다. 눈물이 왈칵 날 뻔했다. 나의 고교시절을 돌이켜볼 때 늘 생각나는 그 친구는 말하자면 입시전략에 성공하진 못했다. 다른 친구들은 상향 지원하여 막판의 막판까지 추가합격 연락이 오는 상황에서 친구는 대번에 합격해 버린 것이다. 즉, 자기 성적보다 좀 낮은 학교였다. 나는 수능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논술과 본고사 성적이 좋았고 거기서 승부를 봐야 했다. 한겨울에 세 번의 무거운 시험을 앞둔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그런 스산한 마음이었던 내게 자신의 아쉬운 입시 결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응원해줬던 친구의 말은 구원이었고 내 평생을 따뜻하게 해주는 말이 되었다.
그렇다. 말은 양날의 칼이다. 외과의사 손의 칼처럼 사람을 구원하기도 하고 범죄자 손의 칼처럼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스피치 라이터들의 열정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세계를 보여준 《오늘은 일진도 좋고》에서는 다음처럼 '말'이라는 것에 대해 표현한다.
반짝반짝하는 마물. 신기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금세 수긍이 갔다. 언어란 마물이다.
사람을 상처 입히기도 하고, 격려해주기도 한다.
...
좋은 마물로 만드는 것도, 나쁜 마물로 만드는 것도 스피커에 달렸다. (125-126쪽)
이 책은 안일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던 20대 여성 고토하가 인생의 멘토를 만나고 스피치를 통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스피치 라이터로 성장해 가며 라이벌이었던 천재 스피치 라이터인 남성과 결혼하게 된다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이다.
고토하는 '언어의 잎'이라는 의미로 유명한 하이쿠 시인인 할머니가 지어준 이름이다. 이름이 무색하게 고토하는 하이쿠를 짓는 것에 관심도 소질도 없다. 회사는 돈을 버는 곳일 뿐, 성취하고픈 것도 간절히 바라는 것도 없이 5년이 흘렀다. 그러나 소꿉친구이자 짝사랑 상대였던 아츠시의 결혼식에서 만난 묘령의 여성 스피치 라이터 쿠온 쿠미를 만나며 평온, 안일, 매너리즘 자체였던 고토하의 삶은 일생일대의 변화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간다.
'살아있는 스피치 라이터의 전설'로 불리는 쿠온 쿠미가 중학교 때 부모님은 여의고 망연자실해 있을 때, 아버지의 친구였던 이마가와 국회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해줌으로써 쿠온 쿠미의 인생의 등불이 되어 준다.
멈추지 않는 눈물은 없단다. 마르지 않는 눈물도 없단다. 얼굴은 아래만을 보고 있을 수도 없어. 걸어 나가기 위해 다리가 있는 거야. 너희 어머니 아버지가 네게 준 몸을 소중히 쓰렴. 그리고 마음은 너 자신이 길러나가는 거야. 넉넉하게, 따뜻하게, 정의감 넘치는 마음으로 길러나가렴. (318-319쪽)
진심이 담긴 한 마디 말의 위력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더욱 깊이 깨닫는다. 순간 입에서 나온 형태도 없는 말이 보이지도 않는 마음을 할퀴어 피가 줄줄 흐르게 하기도 하고, 절망의 밑바닥에 있던 사람을 빛으로 끌어오기도 한다.
별 이변이 없는 한, 내 인생에서 더 이상, 대중 앞에서 스피치할 일은 없겠지만 따뜻한 한 마디, 한 줄의 말을 건네는 넉넉한 사람이 되고 싶다.
쿠온 쿠미 캐릭터 진짜 매력 넘친다. 반면, 성장담의 주인공은 엉뚱하고 어설프나 감춰진 원석같이 재능이 잠재되어 있다는 상투적인 인물상이 있는 것 같은데 이 책에서도 그 공식을 벗어나진 못하는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다. 주인공 고토하에게 초점을 맞춰 어떻게 노력해서 어떻게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 고토하는 작중에서 수십 번 '분해 하고' 수십 번 '울고' 수십 번 '감동하는' 지극히 상투적인 캐릭터였다. 일본에서 4부작 드라마로 제작되었던데 정말 드라마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족인데 고토하 역을 맡은 히가 마나미는 너무 반듯하고 어른스럽고 조용해 보이는 타입이라 미스 캐스팅 같은데 이걸 확인하기 위해 드라마를 한번 봐야겠다.
그리고 정치를 선과 악의 대치 상태로 너무나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그리고 있어서 우리나라 뿐아니라 세계 각국의 작금의 정치상황들을 보건대 현실감이 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반면, 허구성을 바탕으로 하되 개연성이 있는 소설이기에 그릴 수 있는 좋은 정치, 좋은 정치가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고 실제로 이렇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을 위해 일하는 정치가들의 모습을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다 좋은데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언행일치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