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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제명 공주 1~2 세트 - 전2권
이상훈 지음 / 박하 / 2018년 5월
평점 :
일본어를 공부하며 어떻게 이렇게 비슷한 언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해 왔다. 서구권 언어들은 그리스, 라틴어의 어원을 공유하고 서로 정복, 지배하며 언어의 혼합이 이루어졌으니 납득이 됐는데 한국어와 일본어는 아무리 한자문화권이라는 공통점이 있기로서니 이렇게 체계가 비슷할 수가 있을까 생각했기에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됐다.
백제의 왕족 및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언어가 일본에 채용되고 그것이 14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며 독자적으로 변화해 온 것은 아닐까?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우리나라에서도 한자의 일부를 차용하여 이두 문자를 썼다고 배웠는데 일본의 히라가나, 가타가나는 이두를 계승한 것처럼 생각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피나는 연구로 독자적인 문자를 갖게 됐기 때문에 현대 일본어와 한국어 사이에는 표기상 차이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유사성이 큰 언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일본과 한국의 고대사를 사료를 기반으로 하여 소설적 시각으로 조명한 《제명공주》를 알게 되어 큰 호기심을 갖고 읽었다. 제명공주의 이름은커녕, 고대사에 관한 지식이 거의 전무했던 상태에서 열심히 족보 그리며 읽었다. 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던지... (문과지만 외우는 것도 잘 못했던 아픈 과거...)
현대와 고대시대를 오가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현대 한국에서 고대사를 연구하는 문 교수와 그의 조교 조민국이 일본으로 건너가 임성태자의 46대손인 30대 초반 여성 오우치 마사코,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학자 스즈키 교수가 고대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증명해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씨족기》를 찾기 위해 애를 쓴다.
고대 일본의 이야기는 백제 27대 위덕왕의 큰 아들로 왕위계승자인 아좌태자가 일본에서 사망하자 그 동생이 임성태자가 아좌태자의 아들 서동을 자신의 아들로 입적하고 귀족과 지방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일가족을 이끌고 왜로 건나가는 데서부터 주요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좌태자의 아들 서동이 백제로 건너가 30대 대왕 무왕이 된다. 임성태자의 아들 부여 장과 백제의 후예로서 왜에서 막강한 귀족가문을 형성한 소가대신의 딸 하나히메 사이에서 난 의자, 그리고 임성태자의 다른 아들 부여 의광의 딸이 제명공주이다. 이 소설은 결국 의자왕과 제명공주의 장렬한 사랑과 함께 백제와 왜의 장렬한 관계를 그린 역사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에서도 "삼천궁녀 의자왕"이라고 훑고 지나가버리는 비운의 왕 의자왕,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한국 고대사의 한 축인 백제사는 상대적으로 외면받아왔다. 이 소설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우리가 현재 아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이사카 고타로의 《마왕》의 주인공 안도가 끊임없이 되뇌듯 "생각해, 생각해, 생각해"를 잊지 말아야겠다.
역사적 진실에 관해 더욱 관심을 가진 것이 이 책을 읽은 소득이라면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아 있다.
첫째, 천황의 자리에 두 번이나 오른 제명공주의 인물상이다. 백제의 후예라고는 하나 왜라는 지역에 자리잡고 터를 꾸리고 살아가는 백성들을 어떻게 돌보았고 선정을 베풀었는지에 대한 기술은 거의 전무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의자왕에 대한 일편단심 뜨거운 사랑으로 거국적으로 배를 짓고 군사를 일으켜 본국을 지키려 했다는 것이 안타깝다. 애초에 백제를 지키고 계승하려 한다는 대의명분으로 다른 사람의 아이를 품고 삼촌 조메이 천황과 결혼하였고 속였다는 것도, 의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 중대형과 조메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대해인에 대한 애정의 크기가 달랐다는 것도 안타깝다. 그랬기에 대해인의 평생 응어리진 마음이 국가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인 배반을 불러왔던 것이다. 아무리 백제에서 피난 온 유민들이라도 새로 터를 잡은 곳에서 안정적으로 살고 싶은 건 인간의 본성일진대 늘 본국을 위한 전쟁만을 준비하는 제명천황의 모습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둘째, 임성태자의 46대손인 오우치 마사코와 조민국을 의자와 제명공주의 모습에 빗대어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것이 억지스러웠다는 느낌이 든다. 국내에서 방영된 역사 판타지 타임슬립물에서 나왔던 비슷한 패턴들이 답습된 것 같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 들었다.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셋째, 소설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한 보복 정신이 유전자처럼 전승된 것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작금의 적개심의 근원이라는 가정이다. 제명천황의 큰 아들인 중대형이 왕위를 계승했다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머니와 형에 대한 반감으로 천황이었던 어머니 생전에도 백제에의 파병을 반대했고 왜의 지방 귀족들과 반란을 꾀했던 대해인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그는 백제와의 연을 끊고 일본이라는 국호와 일본의 새로운 국가체제를 정비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를 원망하고 복수를 위해 일본이라는 국가가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에서 새삼스럽게 군사를 일으켰을까? 대해인의 뒤를 이은 천황들 또한 새로운 국가를 견고히 세우려 하는 열망이 있지 않았을까? 자신들의 세력 확대를 위한 한반도 침략이 오히려 상식에 맞는 건 아닐까?
어쨌든 역사에 대한 관심이 너무나도 모자랐던 내게 큰 환기를 시켜주었던 책이다. 백제 관련 책들을 더 찾아서 읽어보고 싶은 강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너무나 소설 같은 소설, 그렇기에 현실이 소설만 같다면, 하는 생각을 했지만 꼭 한번 읽어볼 만한 팩션이라고 생각한다